나비의 독 꽃의 쇠사슬 : 공통 루트
Games/蝶の毒 華の鎖 2014. 4. 27. 05:36 |내 컴퓨터에서 썩어가다가 나도 못 찾게 되기 전에 블로그에 백업.
이 뒤를 언제 번역할지는 모르겠다ㄱ- 뭔가 계기가 생긴다면... (하지만 지금 다른 데 버닝 중이라는 게 함정)
오탈자 교정이나 퇴고 따위는 전혀 없이 플레이하면서 막 쓴 그대로라 좀 자신없지만
일어를 모른다 + 후커의 거지 같은 번역률 때문에 게임 진행이 매끄럽지 않다
는 사람에게 약간이나마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며 전체 공개 해둔다.
후커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어느 부분에 CG가 들어가는지 표시는 있을테지만 스샷 전무, 온리 텍스트.
마지마를 제외한 미즈히토(이하 쩌리 셋)의 공통 루트.
「 하아…… 」
유리코는 자기 방의 창문으로 정원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우울했다.
오늘 밤, 노미야 가의 이 저택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유리코의 생일 연회에 관해서다.
( 어째서 이렇게 요란한 연회 따위를…… )
이미 아래층의 커다란 홀에서는 특별히 초빙한 악단이 야회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음악을 연주하는 중이다.
이 날을 위해서 고용인을 늘리고 일류 요리사를 불러 맛있는 요리를 만들게 했으며 유리코의 새로운 야회복을 지었다.
대체 이 하룻밤을 위해 얼마가 들었을지,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유리코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호화롭게 치장한 자신을 전신 거울에 비춰보고 거의 입지 않는 양장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 나 같은 걸 위해서…… 이런 거 이상해. 아버님은 정말 무슨 생각이실까 )
유리코의 불안은 이 노미야 가의 재정 상황에 있었다.
노미야 가는 자작이라고 해도 그 가계는 아주 곤궁했던 것이다.
그것은 매일 빵을 먹는데도 곤란할 정도로, 결코 이런 호화로운 야회를 열 상황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또 여기저기에 부채를 졌을 것이다. 독촉장이 끊임없이 오는 나날임에도.
노미야 가에서 대대로 전해진 가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터.
빚의 담보로 집을 떠난 족자나 장식품은 몇 년전에 돌아가신 조부가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온 것이었다.
그걸 처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집에 이렇게 현란한 야회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연회에 나가고 싶지 않다. 도망쳐 버리고 싶다.
유리코의 마음 속은 계속 그런 기분으로 가득했다.
기뻐야 할 생일이 이렇게 과장스러운 연회가 되다니, 놀람과 당황으로 기분이 침울해졌다.
( …… 내가 없어지면 분명 큰 일이 나겠지 )
무거운 마음으로 야회복의 옷자락을 약간 집어올려 본다.
몸을 단단히 꽉 졸라서 입은 이 옷은 혼자서는 어떻게 벗어야 하는 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걷어 올리면 창문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발코니 근처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그 굵은 가지를 뻗고 있었다.
예전부터 말괄량이였던 유리코는 이 나무에 자주 올라가서 놀았던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리코의 의식은 이 방에서 탈출하는 쪽으로 기울어 간다.
조심조심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살며시 미끄러져 나갔다.
시원한 밤바람을 쐬자 문득 고민했던 게 별 거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나, 실은 야회같은 거 좋아하지 않아 )
반발하는 감정은, 한 번 넘치기 시작하자 끝없이 넘쳐흐른다.
( 양장도 어울리지 않고…… 춤도 서투른 걸. 망신당하기 전에 차라리 도망쳐 버리는 편이 좋을 거야 )
주역이 없어지면 다들 곤란하겠지만, 그건 요령이 좋은 오빠가 어떻게든 수습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도 몸도 가벼워졌다.
유리코는 마음을 정했다.
그렇다, 도망쳐 버리자.
드레스를 허리까지 걷어 올려 유리코는 늘씬한 다리를 드러냈다.
그리고 밑에 보이는 뻗어나온 굵은 가지로 뛰어가려고 난간에 몸을 내밀었다.
그 순간.
「 아, 아가씨! 」
「 윽! 」
밑에서 당황한 기색의 목소리가 유리코를 부른다.
「 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
cg - 마지마
「 어머…… 있었구나, 마지마 」
「 있었구나, 가 아니예요! 뭘 하시려는 겁니까, 위험하잖아요! 」
사용인인 마지마 요시키다.
단정한 얼굴이 밤하늘 아래 창백해져서 유리코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는 유리코가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노미야 가를 섬기기 시작한 25세의 청년이다.
원래는 다른 집의 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조경 실력이 유망해서 거뒀다고 한다.
그 무렵의 노미야 가에는 아직 그런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 너, 왜 그런 데 있는 거야. 이렇게 어두워졌는데도 거기서 정원 손질을 하고 있었어? 」
「 지금 물을 뿌리는 걸 마치고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햇볕이 강했으니까……
그,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
당황하는 마지마를 그리운 듯한, 간지러운 듯한 기분으로 내려다 본다.
유리코는 마지마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다듬은 정원은 아주 아름다웠고, 그의 성격도 마찬가지로 청렴하고 다정했기 때문이다.
마지마 자신도, 이 정원도, 언제나 유리코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식물을 사랑하는 마지마의 그 다정한 마음에 유리코는 온화한 평안을 느끼고 있었다.
「 아가씨, 부탁이니까 위험한 짓은 그만둬 주세요! 」
정원에서 발코니를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말리려고 하는 남자의 모습에 유리코는 무심코 쿡쿡 웃었다.
「 네가 그런 식으로 당황하는 거 오랜만에 봤어. 그러고보면 전에도 이 나무로 뛰어서 옮겨가려고 했을 때였구나 」
「 아, 아가씨…… 어, 어쨌든, 빨리 내려주세요! 」
「 에? 뭐야, 뛰어내려도 돼? 」
「 아, 아닙니다! 그, 그…… 옷자락 말입니다! 」
「 옷자락이라니…… 아! 」
유리코는 간신히 자신이 옷자락을 걷어올려 맨다리를 드러낸 채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당황해서 드레스를 내리며 창피한 나머지 마지마를 노려보았다.
「 저, 정말! 어딜 보는 거야, 마지마! 」
「 아. 죄…… 죄송합니다…… 」
고지식하게 사과하는 마지마의 얼굴이 밤에 보기에도 빨갛다.
전염된 것처럼 유리코의 뺨도 뜨겁게 달아오른다.
죄악감과 수치심에 유리코는 다른 쪽을 보며 토라진 척 한다.
「 나, 나 참…… 너 때문에 의욕이 꺾여버렸어 」
「 에…… 의욕? 」
「 그래. 여기서 나무로 뛰어올라 도망치려고 했는 걸 」
「 에엣?! 」
마지마는 눈을 크게 뜬 뒤 기가 막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 하아…… 정말이지, 아가씨는…… 대체 어딜 가실 작정이셨습니까. 오늘밤은 아가씨의 생일인데 」
「 …… 그치만, 이상하잖아 」
마지마의 당연한 질책의 말에 유리코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 이렇게나 화려한 야회…… 싫어. 내가 이런 호화로운 야회복을 입다니, 돼지 목에 진주라구.
부끄러워서 아무데도 못 나가 」
「 부끄러워할 거 없잖아요. 아주 아름다워요 」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마지마.
한순간 말을 잃고 만다.
「 …… 마지마 거짓말쟁이 」
「 에…… 그럴수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
「 거짓말이야 」
유리코는 몸을 휙 돌려서 마지마를 등졌다.
「 넌 누구한테나 그렇게 말하니까 」
말을 내뱉은 뒤, 등 뒤로 창문을 닫는다.
아직 뺨에 뜨겁게 욱신거리고 있었다.
가슴 안 쪽의 은밀한 고동도 가라앉지 않는다.
( 마지마, 바보…… )
마지마는 다정하다.
어떤 여성에게도 아름답다며 미소짓는다.
말괄량이였던 유리코의 놀이 상대는 약한 하녀로는 감당해낼 수 없기에 언제나 곁에서 상대해줬던 건 마지마였다.
정원일을 하는 한편, 유리코의 이야기를 싫어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우스운 일, 어머님에게 야단맞은 일, 귀여운 고양이를 발견한 일, 좋은 냄새가 나는 과자를 팔고 있었던 일……
그리고 마지마는 언제나 아름다운 꽃을 유리코에게 주었다.
오늘은 백합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마치 아가씨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하지만 그건 자신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유리코는 어느샌가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갑갑한 응어리가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그것은 가끔 느닷없이 얼굴을 내밀어 유리코를 괴롭힌다.
( 싫어…… 저런 남자 )
가슴에 손을 대며 유리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마지마 위에 뛰어내리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발코니에서 몸을 내민 것만으로 그렇게 당황했으니까 틀림없이 더 놀랄 게 분명하다.
그런 상상을 하자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렸다.
유리코는 늘 온화한 마지마를 깜짝 놀라게 만들거나 곤란하게 하는 게 재밌었던 것이다.
「 유리? 들어갈게요 」
「 아…… 어, 어서 들어오세요. 어머님 」
느닷없이 들려온 어머니, 시게코의 목소리에 유리코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 위험했다…… )
좀 전의 뛰어내리려던 현장을 보였다면 큰 소동이 됐을지도 모른다.
「 어머나, 유리, 뭔가요. 오늘 밤의 주역이 아직도 이런 곳에서 숨어있다니 」
「 …… 그치만, 나가고 싶지 않은 걸요」
「 저런! 또 그런 소리나 하고…… 당신을 위한 야회예요. 어리광 부리지 말아요 」
「 하지만…… 」
어머니의 어처구니 없어 하는 목소리에 유리코는 뾰로통해져서 시선을 떨궜다.
「 유리코, 왜 그러느냐? 몸 상태라도 나쁜 게냐 」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 야스유키까지 유리코의 상태를 보러왔다.
유리코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이루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도망치려던 자신을 순수하게 걱정해주는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 …… 아뇨, 아버님. 유리코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
「 그럼, 빨리 모두에게 얼굴을 보여드리렴. 네 등장을 기대하고 있으니까 」
「 …… 네. 알겠습니다 」
유리코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양친이 나란히 데리러 와서 어쩔 수 없다.
어머니의 화사한 목소리. 아버지의 상냥한 미소.
두 사람은 밝고 즐거워 보이는 분위기지만, 자신은 그런 기분이 될 수 없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래층의 떠들썩한 소란이 유리코를 한층 우울하게 만든다.
모처럼 이렇게 생일 연회를 열어줬는데도 집안의 재정을 걱정하는 자신은 불효자인 걸까.
( 내가 돈이 걱정된다고 말하면 분명히 아버님도 어머님도 실망하실 거야…… )
유리코는 얼마 전까지 가쿠슈인(学習院)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곳에서 느긋하게 보낸 나날을 떠올린다.
학우인 영애들은 돈 따위는 생각하는 것도 더럽다는 분위기로, 항상 우아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경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저속한 일이라는 풍조가 있었다.
거기서 펼쳐지는 건 무도회 이야기, 다과회 이야기, 치장하는 이야기, 사교계의 소문…… 쓸데없는 작은 새들의 수다.
전쟁 뒤의 호경기에 세상이 요동치고 새로운 오락의 자극에 한창 열광하는 와중에 유리코는 집안을 생각하느라 거기 어울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배우는 걸 좋아했던 유리코는 진학하고 싶었지만, 이 집의 상황 때문에 단념했던 것이다.
스샷
「 유리코, 아아, 새로운 야회복을 입었구나 」
「 아…… 오라버니 」
잠시 멍하니 있던 유리코를 오빠, 미즈히토의 고요한 목소리가 현실로 되돌렸다.
단정하지 못한 가벼운 복장으로 벽에 기대어 눈부시다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유리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아색의 피부에, 까맣게 젖은 눈동자. 윤기가 도는 긴 흑발,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몸.
친오빠임에도 그 모습은 광채가 나는 것처럼 아름다워서 유리코는 종종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말 때도 있다.
미즈히토는 취미로 시나 회화의 세계를 즐기고 있지만, 유리코는 무엇보다도 오빠 그 자체가 예술 같다고 여긴다.
화가에 뜻을 두고 해외로 유학을 원했던 적도 있었으나 양친의 반대로 그 꿈은 허무하게 깨졌다.
그 때문인지 자포자기한 생활을 보내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그 뒤로 주색잡기가 끊이지 않는 약간 곤란한 오빠이기도 하다.
미즈히토는 한동안 여동생을 바라본 다음, 붉은 입술을 벌렸다.
「 …… 누군가 했어, 유리코. 넌 언제나 귀엽지만 오늘 밤은 한층 더 사랑스럽구나 」
「 정말…… 오라버니는 언제나 과장이 심해요 」
「 나는 솔직한 마음을 말했을 뿐이야 」
「 미즈히토도 참! 당신, 아직도 그런 모습으로! 」
언짢은 얼굴로 어머니는 아들을 노려보았다.
「 오늘 밤은 중요한 손님이 잔뜩 오신다고 했는데, 어째서 정말…… 」
「 괜찮지 않습니까. 저한테 양장은 어울리지 않아요 」
「 게다가 그 머리, 어떻게든 하라고 항상 말하는데도…… 아아, 여보, 당신도 뭐라고 말씀해 주세요! 」
「 괜찮아, 괜찮아. 말해봤자 안 들을테지. 그보다도, 오늘의 주역은 유리코다 」
「 그래요, 어머님. 오늘 밤의 꽃은 이 가련한 아가씨. 다른 이들은 오히려 별이 빛날 수 있도록 어둡지 않으면 안 되죠.
유리코…… 정말 귀엽구나. 이대로 널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야 」
「 어머, ……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여동생한테 」
「 어머님은 심기가 편치 않으신 것 같군. 폭풍이 치기 전에 물러가볼까 」
가시돋친 모친의 목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미즈히토는 옷자락을 가다듬고 방에서 나갔다.
그러자 부인들의 새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시게코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입가를 눌렀다.
「 …… 미즈히토는 정말 경박하네요. …… 피는 속일 수 없다더니 」
「 시게코! 」
남편의 노성에도 불구하고, 시게코는 쌀쌀맞게 등을 돌렸다.
「 자, 갑시다, 유리 」
「 네, 네…… 어머님 」
유리코는 남몰래 한숨을 쉬고 하얀 레이스 장갑에 가녀린 손가락을 넣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에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유리코와 오빠인 미즈히토는 생모가 다르다.
유리코의 친모인 시게코는 남편이 하녀에게 낳게 만든 미즈히토를 여전히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코는 부모님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그러자 시야의 한 구석에 비친 남자의 존재에 피부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하인인 사부로다.
2년 쯤 전부터 이 집을 섬기고 있는 남자다.
힘쓰는 일이나 운전기사 같은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는, 과묵하고 몸집이 큰 투박한 인상의 남자.
사부로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음울하고 생기없는 눈으로 유리코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코는 불쾌감에 몸을 떨며 시선을 돌린다.
우울한 기분일 때 음침한 얼굴의 사부로를 만나자 기분이 더욱 더 가라앉아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 기분 나쁜 남자…… )
유리코는 사부로와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사부로의 시선은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유리코를 끈적끈적하게 쫓고 있다.
유리코는 불쾌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지금 집안의 상황으로서는 낮은 임금으로 일을 잘 하는 사부로를 그만두게 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사부로의 시선이 목덜미 근처에서 느껴지자 피부에 땀이 살짝 흐르는 걸 느끼며 유리코는 굳은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방에서 나와 정원을 마주보는 큰 홀로 들어가자 떠들썩한 환호성이 와아 울려퍼지며 유리코를 감쌌다.
유리코는 객실에 보인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엔 귀족원에서 활약하는 모 후작이나 사교계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유럽에서 돌아온 모 백작부인 등 쟁쟁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대체 이게 뭐야…… 역시 도망쳤으면 좋았을텐데! )
빈곤한 화족인 노미야 가에 어울리지 않는 그 호사스러운 분위기에 유리코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집에서 이렇게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손님을 맞이한 적이 없었다.
오늘 밤은 모든 것이 평소와 달랐다.
「 저, 저기…… 여러분, 기다리게 해서…… 」
「 어머, 유리씨! 멋진 옷이군요! 」
「 정말! 발랄한 아름다움이 화려하게 돋보여서 마치 프랑스에서 온 인형 같아요! 」
인사를 하려던 유리코의 목소리는 잘 알고 있는 시끄러운 부인들의 새된 수다에 가로막혔다.
평소라면 적당히 웃어 넘기는 이런 대화도 이런 분위기의 장소에서는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다.
긴장에 동요가 더해져 유리코는 뺨을 새빨갛게 붉혔다.
「 시, 싫어요…… 아주머님들도 참. 그런 과분한 말씀, 저한텐 아까워요 」
「 유리씨는 기모노도 좋지만 양장도 참 잘 어울리네요. 오늘 밤은 당신에게 청혼하는 남자분들이 많이 있겠어요 」
「 네에, 그렇고 말고요! 어머, 그렇게 뺨을 붉혀서는…… 귀엽게도 말이죠! 」
숨쉴 틈도 없을 만큼 야단스러운 겉치레 말의 폭풍우에 유리코는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어졌다.
대체 오늘 밤은 어떻게 된 일인 걸까.
지금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일 연회를 연 적 따윈 없다. 기껏해야 일가 친척들이나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모이는 정도였는데.
경직된 유리코의 어깨에 아버지가 따스한 손을 얹었다.
「 이런 이런, 부인들, 딸을 너무 놀리지 말아주세요 」
「 아버님…… 」
「 유리코, 히데오군이 와있는 거 같더구나. 어찌된 일인지 연회장에 들어오려 하지 않으니 불러 오거라 」
「 …… 네, 알겠습니다 」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유리코를 수다스러운 부인들에게서 떼어놓았다.
유리코는 아버지의 배려에 감사하면서도, 왜 이런 야회를 열었는지 의아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자신 같은 건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딸 한 사람의 생일에 이런 격식있는 사람들을 모으다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 때, 정원 쪽에서 화사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도련님, 이라며 떠들어대는 여자들의 모습에 유리코는 그 원 가운데 오빠가 있다는 걸 알았다.
손님들의 주목에서 벗어나자 아버지는 딸의 모습을 따스한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봐서, 약간 부끄러운 듯이 수줍었다.
「 유리코. …… 오늘 밤의 넌 정말 아름답구나. 너도 완전히 어른이 다 됐어 」
「 …… 무슨 소리예요. 유리코는 아직 어리답니다 」
「 후후. 그래, 넌 내게는 언제까지나 어린애야……
너한테는 반드시, 앞으로 불편한 생활은 시키지 않겠다. 너는 내 유일무이한 보물이니까 」
「 싫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아버님. 벌써 술에 취하셨어요? 」
농담처럼 웃어넘기면서도, 아버지의 다정한 말에 유리코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사내아이처럼 기운찬 유리코를 귀여워하며 애지중지한 아버지.
그는 그다지 남성적인 난폭함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화도(華道)가 가업인 유서깊은 공가(公家)의 피를 잇고 있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는 섬세한 용모였다.
유리코는 주위에서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했다.
얌전하고 자그마한 유리코의 얼굴은 예전부터 이치마츠 인형(市松人形) 같다는 평판이었다.
한편 어머니는 뚜렷한 이목구비로, 딸과는 그다지 닮지 않은 용모다.
어머니의 친가는 유복한 무가(武家) 화족으로, 분방하게 자란 그녀는 화려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어머니의 낭비벽이 지금의 노미야 가가 곤궁한 원흉이라는 걸 유리코도 알아차리고 있다.
다정한 용모는 아버지와, 강한 성격은 어머니와 닮았다는 말을 듣는 유리코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 아버님은…… 가여운 분이셔 )
언제나 자상한 표정으로 미소짓고 있는 아버지.
그 모습은 아이처럼 순수하기도 하고 노인처럼 고요하기도 했다.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인 어머니의 낭비를 불평 한 마디 없이 허용하고 있다.
그것은 자산가에서 시집 온 아내를 갑갑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서글픈 다정함이다.
그걸 생각하면 아버지가 하녀에게서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 했던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자존심 높은 어머니의 신경을 더욱 더 거슬리게 해버렸지만.
( 난 어머님과 달라. 반드시 아버님을 슬프게 만들지 않을 거야 )
유리코는 아버지를 위해서 이 집을 구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걸 위해서 자신은 뭘 할 수 있을까?
유리코는 애써 막연한 불안에서 눈을 돌렸다.
유리코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소꿉친구인 히데오를 찾으러 홀을 나왔다.
그러나 히데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유리코는 문득 누군가가 소근소근거리며 뭔가 얘기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
무심코 기둥의 그림자에 몸을 감추고, 숨을 죽인다.
어쩐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 저기, 생각해봤어? 그 얘기 」
「 그러니까…… 나한테 그럴 생각은 없다고 말했잖아 」
( …… ! 마지마하고 최근에 들어온 하녀다…… )
하녀는 마지마에게 매달리듯이 팔을 휘감고 있다.
남자가 좋아할 만한 육감적인 젊은 여자로, 이따금 마지마와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어딘가 수상쩍은 모습이다.
「 확실한 얘기야. 여긴 이제 돈을 충분히 못 준다구. 응, 그러니까 같이 다른 데로 가자! 」
「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말아줘. 난 여길 떠날 생각 없어 」
「 그렇게 말해봤자, 당신도 슬슬 가정을 꾸리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아? 」
여자는 달콤한 목소리를 내며 커다란 젖가슴을 마지마의 팔에 밀어붙인다.
「 여자라면 다들 당신한테 반해버릴 걸. 누구라도 쫓아올 거야. 그치만 이런 데 있으면, 여자를 부양할 수 없잖아? 」
「 난 가정을 가질 생각도 없어. …… 쓸데없는 말 그만해. 일하러 가지 」
마지마는 여자의 팔을 뿌리쳤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친 여자는 눈초리를 매섭게 뜬다.
「 뭐야, 차갑긴! 당신, 나한테 반한 거 아니냐구! 」
「 반했다고? …… 어째서 」
「 꽃을 줬었잖아! 얼굴이 예쁘다고 칭찬하거나…… 」
「 …… 착각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하다. 특별한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야 」
「 …… 거짓말이야! 」
「 유감이군 」
마지마의 냉랭한 태도에 여자는 새빨간 얼굴로 입술을 떨며, 코웃음을 쳤다.
「 흥, 뭐야, 기개도 없는 남자였어! 아무리 잘생겼어도, 이래서야 사부로 쪽이 훨씬 좋다구! 」
「 …… 사부로? 」
「 그래! 아무리 꼬셔도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당신과 다르게 그 녀석은 언제 어디서든 거길 벌떡 세워주니까 말이야! 」
「 ………… 」
「 그 녀석은 말이지 굉장하다구. 여기가 홍수처럼 될 때까지 핥아주거든. 어젯밤도 나 몇 번이나 가버렸어…… 」
여자는 달뜬 목소리로 도발하듯이 속삭인다.
그러나 마지마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기가 막힌 것처럼 한숨을 내쉴 뿐이다.
「 …… 그 녀석도 어쩔 수 없는 놈이군…… 뭐, 나하고는 관계 없지. 둘이서 열심히 즐겨줘 」
「 ! 어, 어째서야…… 너무 매정하잖아…… 」
「 너뿐만이 아니야. 난 누구한테도 흥미가 없어 」
「 …… 정말로? 」
「 아아 」
「 그럴 리 없잖아. …… 당신 설마, 그 공주님을 연모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 읏…… 」
순간, 마지마의 표정이 굳어진다.
마지마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여자는 이때라는 듯 우쭐거린다.
「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이유가 그거? 사이가 너무 좋더라니…… 당신 큰 걸 노리고 있구나. 이 집을 가로챌 작정? 」
「 …… 바보 같은 소릴 」
마지마는 여자를 차갑게 일별하며 눈을 가늘게 뜬다.
「 기가 차는 여자로군 」
「 에? 아…… 자, 잠깐만! 」
마지마는 여자를 내버려두고, 재빠르게 열어둔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이빨을 드러낸다.
「 젠장! 뭐야, 저 녀석…… 」
「 ──── 이봐, 거기서 뭘 하는 거냐 」
그때, 엄한 목소리가 여자의 등을 두드렸다.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리고 뒤돌아 본다.
cg -
거기엔 집사인 후지타가 서 있다.
「 후, 후지타 님…… 」
「 부엌의 일손이 부족하다. 거들러 가라 」
「 네, 네에…… 」
겸연쩍은 듯한 얼굴로 당황해서 안 쪽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여자.
후지타는 그 뒤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기운차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오가는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유리코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조금 전의 이야기를 멍하니 반추하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다들 그런 식으로 천박한 대화를 나누는 걸까.
그 하녀와 사부로가 이러니 저러니…… 그 노골적인 말을 떠올리자 얼굴이 붉어지고 만다.
하지만 마지마는 그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리코는 그 사실에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마지마까지도 그 저속한 이야기의 등장인물이었다면 몹시 환멸스러웠을 것이다.
( 그렇다 해도…… 집이 기울고 있다는 걸 고용인들도 다 알고 있구나…… )
분명 그 하녀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잇달아 그만둬버릴 것이다.
그러지 않더라도 이쪽에서 해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 그런데도…… 이렇게 큰 야회를…… )
「 공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
그 때, 후지타가 유리코의 존재를 깨달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키가 큰 후지타의 그림자가 유리코를 덮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서 어둡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가 그가 순수한 일본인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극도로 무표정한 얼굴과 더불어 유리코는 후지타를 외국의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이 집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유리코를 공주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당주는 영주님, 부인을 마님, 차기 당주는 도련님이라고.
그것은 유신 이전에 이 집이 영주였던 무렵의 잔재로, 유리코는 약간 시대착오적이라 느끼고 있었다.
「 후지타, 히데오 씨 어딨는지 못 봤어?」
「 아뇨……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
「 그래…… 그럼 어디 간 걸까 」
「 …… 공주님, 기운이 없으시군요 」
후지타의 보랏빛 눈동자가 살펴보는 듯한 눈초리가 된다.
유리코를 어릴 때부터 보아온 후지타는 그 변화를 예민하게 꿰뚫어 본다.
유리코는 그 후지타의 눈을 믿음직하면서도 무섭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이국의 피가 섞인 눈동자로 자신을 낱낱이 간파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기분이라도 나쁘십니까? 공주님 」
선택지 - 1
괜찮아
야회에 나가고 싶지 않아
「 아니, 괜찮아. 왜? 」
「 그러십니까…… 아뇨, 안색이 좋지 않으신 것처럼 보여서 」
「 그래? 별로 몸 상태가 나쁜 건 아니지만…… 」
유리코는 잠깐 말을 머뭇거리다가 과감하게 후지타 쪽으로 돌아섰다.
「 …… 넌 뭔가 알고 있어? 오늘 밤에 야회에 대해서 」
「 그…… 말씀은? 」
「 아무리 그래도 너무 호화스럽잖아. …… 넌 집사니까 이 집 상태를 잘 알고 있겠지? 」
「 …… 공주님께서는 그런 건 신경쓰지 마시고, 그저 야회의 주역으로 계시면 된답니다 」
「 그치만…… 」
「 공주님. 주인님은 공주님을 위해서 이 야회를 여신 겁니다. 그 마음을 부디…… 」
「 …… 응. …… 그렇네 」
아버지가 이 힘겨운 처지에서 어떤 고생을 해서 오늘 밤의 야회를 열었는지 유리코도 알고 있었다.
그저 불안했던 것이다.
유리코는 그 불안을 후지타에게 호소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 후지타, 잠시만 」
「 네, 마님. …… 공주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 응 」
「 …… 아아 그렇지, 이것을 」
「 ? 」
후지타는 유리코의 손에 어떤 꾸러미를 쥐어주고 계단 위의 시게코에게로 서둘러 갔다.
이러쿵저러쿵 큰소리로 지시하는 시게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집에서 실직적인 최고의 권력자는 유리코의 어머니, 시게코였다.
물론 가장은 야스유키지만, 자상하고 온화한 기질의 이 당주는 그다지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무리한 일을 시키지도 않는다.
아랫사람들은 모두 기가 센 시게코의 비위를 맞추며 그 여왕 같은 거동에 위축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오직 후지타만은 그런 역학 관계를 별로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는 윗사람들 중 누구를 대할 때도 똑같이 따르고 아랫사람들도 똑같이 부렸다.
그 조각과도 같은 용모 때문에 냉정해 보이는 후지타지만, 그는 그냥 지극히 성실한 남자일 뿐인 것이다.
유리코는 그런 후지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건 후지타가 이 집에서 가장 아버지를 존경하는 사용인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유리코는 아버지를 사랑해주는 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문득 손 안의 물건을 떠올려 작은 꾸러미를 열었다.
유리코는 무심코 혼자 미소지었다.
( 초콜릿이구나…… 후지타도 참 )
후지타는 그 딱딱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달콤한 걸 굉장히 좋아하는 것이다.
유리코가 기분이 나쁠 때 마치 약이라도 주는 것처럼 주머니에서 불쑥 단 것을 몇 개 꺼내 놓는다.
입에 넣자 이내 녹았다.
그 달콤한 맛을 음미하며 후지타는 늘 과자를 갖고 다니는 걸까, 의아해 했다.
커다란 등을 둥글게 말고 몰래 과자를 집어먹는 후지타의 모습을 상상하자 어쩐지 우스워서 웃어버렸다.
그 때, 불시에 누군가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를 깨닫는다.
「 어이, 유리코 」
「 엣…… 아, 히데오씨! 」
cg - 히데오
뒤돌아보자 거기엔 찾고 있던 히데오의 모습이 있었다.
군복으로 몸을 감싸고 언제나 꼿꼿하게 똑바로 서있는 소꿉친구.
그 모습을 올려다보는 유리코의 얼굴에서 미소가 흐려진다.
히데오의 분위기는 언제부턴가 유리코에게 묘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은테의 안경 너머로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 유리코를 향하고 있다.
그 시선에 유리코의 가슴에 불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유리코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히데오는 지금 기분이 매우 나쁜 것이다.
「 어디 있었어? 찾고 있었는데 」
「 정원에 있었다. 방문객들 인사가 멈출 때쯤 얼굴을 내밀까 해서 」
「 정원? 별나긴. 밖은 이미 어둡잖아 」
「 저택 안보다는 훨씬 편해. 나한테 화려한 야회는 안 어울리고. 기름기 도는 무리들이 떠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
「 …… 히데오 씨, 여전하구나 」
히데오의 쌀쌀맞은 말에 유리코는 내심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오자키 히데오. 남작가의 외아들.
유리코와는 집안 끼리 친분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자주 함께 놀았던, 흔히 말하는『소꿉친구』다.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지금은 육군 포병 소위로 있다.
옛날부터 결벽증이 있었지만 최근엔 더욱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라, 소꿉친구라고는 해도 유리코는 히데오를 약간 멀리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는 분명히 다정했던 히데오의 시선은 지금은 얼음처럼 차갑다.
어느 무렵부터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유리코는 기억나지 않는다.
「 …… 그런데, 오늘 밤은 꽤나 치장을 하고 있군, 유리코. 일부러 오늘을 위해 주문한 건가 」
「 으, 응. 맞아. 아버님이 준비해 주신 거지만…… 」
새로운 야회복을 빈정거리는 말에 유리코는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거창한 야회복을 입은 걸 보고 히데오는 틀림없이 마음 속으로 실소를 터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웃음 당할 준비를 하던 유리코에게 히데오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 흥…… 자작도 필사적이다. 오늘 밤에 승부를 건 것 같군 」
「 승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
「 …… 너, 아무것도 못 들은 건가 」
히데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 이 야회는 네 결혼 상대를 고르기 위한 것이다 」
「 엣…… 」
「 그걸 위해 있는 힘껏 허세를 부려서 널 가치있는 집안의 딸처럼 보여주는 거지 」
전류 같은 충격이 곧바로 유리코의 몸을 꿰뚫었다.
―――― 그런가. 그랬던가.
생각해보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혼기에 접어든 딸의 생일. 각별히 호화로운 연회. 평소 본 적이 없는 손님 층.
유리코는 순진하게 집안의 재정을 걱정할 뿐이었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 …… 눈치 채지 못했어 …… 바보구나, 나 」
「 뭐, 현명한 계획이지. 자작가라고는 해도, 빚이 있는 가난한 집안의 딸을 얻고 싶어하는 별난 자는 적을테니까 」
「 …… 그래서, 아버님은…… 」
네게 불편한 생활은 시키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유리코를 훌륭한 집안에 시집 보내기 위해서 대외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허세를 부린 야회를 열었던 것이다.
유리코는 고개를 숙여서 입술을 깨물었다.
( 역시…… 아버님 말씀대로, 난 어린애야…… )
그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해서 도망치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신경이 약간 날카로웠던 어머님……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후지타…… 초연했던 오라버님…… 그리고, 자상한 아버님.
유복한 집안과의 결혼―――― 그게 여자에게 있어 제일 가는 행복.
알고 있다. 여자의 길은 외길이라는 걸.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다가오다니.
숨이 막힐 것 같다.
역시 도망쳐 버리고 싶다.
어디론가―――― 혼자서? 모른다.
「 유리코. 넌 어때 」
「 에……? 」
격심한 동요에 멍하니 있던 유리코에게, 히데오가 차가운 어조로 묻는다.
「 어쩔 작정이냐고 묻고 있는 거다. 어차피 머지않아 시집갈테지 」
「 그거야…… 분명히 그렇겠지. 당연한 일이니까 」
「 …… 애매하군. 넌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건가 」
「 나, 나는…… 」
선택지 - 2
결혼할 수밖에 없겠지
관심 없어
「 …… 결혼할 수밖에 없겠지 」
「 자포자기로군 」
「 그치만 집안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것밖에 없으니까…… 」
「 네 진정한 마음은 어때 」
「 …… 진정한? 」
「 아까는 아주 놀라고 있었잖아. 그건 그냥 의외였기 때문일 뿐인가 」
「 난…… 」
어째선지 집요하게 추궁하는 히데오에게 난처해 하면서도, 유리코도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정직한 생각을 털어놓는다면……
「 …… 사실은, 결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
머리로는 집안을 위해서 머지않아 필히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본심을 말하자면 싫었다. 불안한 것이다.
「 헤에. 그럼 어쩔 생각이냐. 집을 나가 카페에서 여급이라도 할 건가? 」
「 그, 그럴 생각은 없어. …… 그냥, 난…… 정직하게 말한 것 뿐 」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 …… 결혼은 …… 조만간 할 거야. 여자의 의무인 걸. 내 마음과는 관계 없잖아 」
「 흥…… 제법 얌전한 소릴 하는군 」
히데오는 머쓱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 너도 결국, 시시한 화족 영애인가 」
「 …… 그럼 히데오 씨는 대체 내가 뭐라고 대답하길 바라는 거야? 」
무심코 반발하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만다.
심술궂은 소꿉친구. 차가운 얼굴로,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차가운 입술로 차가운 말밖에 하지 않는다.
「 내가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면, 히데오씨가 뭘 해줄 수 있는데! 」
「 …… 훗. 네가 화내는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
히데오는 씨익 웃었다.
「 그렇군……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손을 잡아끌고 도망쳐줄 수도 있지 」
「 에…… 」
예상 외의 대답에 유리코는 허를 찔린 것 같았다.
「 도망치다니…… 대체 어디로? 」
「 글쎄. 대륙이라도 갈까? 바다의 건너편에 」
「 대륙……? 」
「 넌 본 적도 없을테지. 넓다고, 일본의 밖은. 나랑 가볼래? 」
「 …… 히데오 씨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할 줄은 몰랐어 」
유리코는 점점 우스워져서 쿡쿡 웃음을 터뜨린다.
히데오는 울컥한 것처럼 불쾌한 얼굴이 되었다.
「 뭐가 웃긴 거야 」
「 후후, 그치만…… 당신, 농담 같은 건 좀처럼 안 하잖아 」
「 …… 농담 …… 」
「 혹시, 오늘 야회가 결혼 상대를 고르기 위해서라는 것도 농담이야? 」
「 …… 설마 」
히데오는 빙긋이 냉소를 띄우며, 안경테를 쓱 밀어 올렸다.
「 이건 확실한 얘기다. 네 상대는 오늘 밤에 결정된다 」
「 ………… 」
「 너도 이 집안의 상황을 알고 있겠지. …… 자산가와의 결혼이 의무라는 걸 」
「 그렇게 말하지 마…… 」
「 뭐야. 내 말이 틀렸나? 」
고압적인 어조에 유리코는 입을 다물고 열지 않았다.
「 네 집안은 돈 씀씀이가 헤픈 마님이 망쳐 놓았지. 소심한 영주님은 거기 깔려서 잠자코 있을 뿐.
예술이나 여자에 미쳐서 쓸모없는 도련님은 의지할 수 없어.
그렇다면, 네가 여자라는 신분을 써서 돈을 마련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 공주님 」
「 너무해…… ! 왜 그렇게 매정한 말만 하는 거야! 」
「 네가 들뜬 얼굴을 하니까 자각시켜 주려고 했을 뿐이다 」
「 내 생일 밤에 그런 말을 하러 온 거야?! 그런 거 필요 없어! 내 소중한 가족을 모욕하지마!! 」
「 모욕하지 말라고? …… 하! 그렇다면 내 집안을 깔보는 것도 그만뒀으면 좋겠군! 」
「 에…… ? 무슨 소리야, 나는…… 」
「 네 부모님 말이다 」
히데오의 씁쓸한 표정에 유리코의 얼굴도 조금 흐려진다.
집안에 대해서 자신의 부모가 히데오의 집을 경시하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화족은 대략적으로 몇 가지의 종류가 있었다.
수가 많은 것은 무가 화족(武家華族), 공가 화족(公家華族), 그리고 훈공 화족(勲功華族)이다.
무가나 공가는 예로부터 이어진 혈통에 따라 작위를 하사받은 자들.
훈공 화족은 유신이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작위를 받은 자들로, 신화족(新華族)이라 불렸다.
유서 깊은 구화족(旧華族)들 대부분은 그 신화족들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오자키 가는 신화족이며, 유리코의 집안은 구화족.
확실히 어머니 시게코가 오자키 가를 『천한 가문』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걸 유리코도 들은 적이 있었다.
「 공가인지 무가인지 모르겠지만, 이 다이쇼 시대에서 그런 걸 물고 늘어지는 건 실로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계보를 내세워 큰소리치기 전에 부채나 어떻게 해야겠지. 그렇지 않나, 유리코 」
「 히데오 씨…… 」
유리코를 그 자리에 남겨 두고 히데오는 연회장으로 척척 걸어가 버렸다.
덩그렇게 홀로 남은 유리코는 머릿속으로 히데오의 말을 반추한다.
히데오가 유리코에게 차츰 냉정해졌던 건 틀림없이 집안 사이의 관계가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집안을 계속 경시당한 울분을 시집으로 가문을 살릴 수 밖에 없는 유리코를 비웃는 걸로 푼 것일까.
유리코 자신은 히데오를 깔보는 마음 따윈 티끌만큼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히데오는 모르는 사이에 열등감과 반발을 느끼고 말았던 걸까……
( 그렇다고는 해도…… 이 야회는…… )
히데오가 가져다 준 사실.
눈치채지 못했던 너무나 명백한 목적.
이 집의 곤궁을 아는 자는 그다지 없다.
이 정도로 커다란 야회를 열면 사람들이 받는 인상은 실상과는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관계가 가까운 히데오의 집에는 얼마간 빌렸기 때문에 알려져 있었다.
시게코의 친가나 그 친척들에게도 염치없이 빌리고 있지만, 일가의 수치를 타인에게 누설할 리 없다.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
그러나 공가 화족 중에 가난한 집이 많은 건 흔한 일이다.
그리 드물지는 않다.
그게 이제는 물러설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는 사실은 이 야회를 보고서는 생각하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조금이라도 조건이 더 좋은 상대를, 이라고 아버지가 고심한 결과가 이 야회였던 것이다.
( 오늘 밤…… 정하지 않으면 안돼 )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자신은 앞으로 어떤 남자와 함께하게 되는 걸까.
스샷
발코니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유리코는 자조했다.
( 그런 건 불가능해…… 왜냐면 신분이 다른 걸…… )
유리코는 어렴풋하긴 하지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처음인 그 사랑이 실현되는 일은 아마도 영원히 없다.
유리코는 약한 현기증을 느껴서 작은 소리로 신음하며 휘청휘청 벽에 기댔다.
그러자 느닷없이 강한 힘에 어깨가 안겨졌다.
( 히데오 씨……? )
히데오가 돌아온 걸까라는 한순간 머리를 스친 예상은 충격과 함께 빗나갔다.
「 …… 공주님, 상태가 나쁘십니까 」
비틀거리는 유리코를 튼튼하고 두툼한 손으로 지탱하고 있었던 건 그 사부로였던 것이다.
짐승 같은 사부로의 체취가 유리코의 코 끝에 달라붙는다.
털이 많고 두툼한 사부로의 손의 후덥지근한 체온이 옷감을 통해 유리코의 피부에 스며든다.
오싹하는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좀 전의 마지마와 하녀의 대화를 떠올린다.
생리적인 혐오감에 유리코는 입술을 떨었다.
「 읏! 싫어!! 」
무심코 유리코는 부들부들 떨며 몸을 비틀어서 사부로에게서 빠져나갔다.
움푹 들어간 눈동자가 놀라서 크게 뜨여진 순간, 그 눈 안에 날카로운 증오와 비슷한 감정이 어린다.
그 눈빛에 유리코는 창백해졌다.
사부로는 이내 아차하는 얼굴로 머리를 내렸다.
「 죄, 죄송…… 무, 무례한, 짓을…… 」
「 …… 미, 안해. 괜찮아…… 놀랐을 뿐이야…… 」
사부로에게 끌어안긴 감촉이 생생하게 남은 어깨를 안았다.
사부로는 깨닫고 보면 곁에 있다.
언제나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비명을 질러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두려웠다.
사부로는 아직 유리코를 바라보고 있다.
유리코는 마치 뱀이 노려보고 있는 개구리처럼 움직이지 못한 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 뭐야…… 어째서, 빨리 다른 데로 안 가는 거야! )
( 히데오씨…… 부탁이야, 돌아와! 후지타, 여길 지나가줘! 오라버니…… 유리코를, 구하러 와줘요! )
「 ──── 어머, 너, 사부로잖아 」
갑자기 명랑하고 고운 목소리가 울렸다.
바로 그 순간, 유리코의 주박이 풀렸다.
사부로는 '앗'하는 소리를 내며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본다.
cg * 쿄코
「 쿄, 쿄코 님……」
「 싫다, 너 여기서 일하고 있었구나. 놀랐어 」
유리코는 느닷없이 나타난 그 부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
나이는 대략 이십대 후반일까.
겉보기에는 좀 더 젊어 보이지만, 그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삼십을 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몸에 지닌 것도 한 눈에 고급이라는 걸 알게 하는 기품을 휘감고 있었다.
선명한 기모노, 빛이 나는 것처럼 요염한 외모…… 꽃에 비유하자면 새빨갛고 꽃송이가 커다란 장미일 것이다.
「 사부로, 이런 데 있어도 괜찮을까. 사용인들은 꽤나 바빠보이던데 말이야 」
「 ! 예, 예에…… 시, 실례하겠습니다 」
여자의 말에 사부로는 정신을 차린 것처럼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유리코는 두 사람의 대화를 멍하니 바라만 볼 뿐.
문득 여자의 시선을 깨닫고 멍하니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숙인 유리코에게 여자는 교태롭게 웃었다.
「 후훗…… 당신, 사부로가 싫은 거죠 」
「 엣! 그…… 그게…… 」
「 그 남자는 전에 우리 집에서 썼었어. 조금 말썽을 일으켜서 쫓아냈지만…… 설마 여기 있었다니 」
어조가 약간 경박해진 여자에게 유리코는 불안을 느꼈다.
갑자기 나타나서 사부로를 쫓아버린 여자…… 그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 그건 그렇고, 주인공이 없다 했더니 이런 데서 노닥거리고 있을 줄은.
자아, 빨리 번화한 곳으로 가요. 알았죠, 아가씨 」
「 네, 네…… 」
유리코는 이름도 모르는 여성에게 손을 이끌려 당황하면서도 거기에 따라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 저기…… 실례지만, 당신은…… 」
소란스러운 홀로 돌아왔을 때, 유리코는 가까스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이 여성에게는 어딘가 사람을 압도하는 면이 있어서 무엇을 물어야 좋을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 나? 나는 말이죠, 아마미 쿄코라고 해요 」
선명하게 생긋 웃으며 여자는 명랑한 목소리로 이름을 댔다.
「 보잘 것없는 술도가의 딸이예요. 화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미천한 몸이죠 」
「 에! 그 아마미의…… 」
아마미의 술도가라고 하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유리코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복한 가문이다.
그런 집안의 사람까지 아버지는 오늘 밤의 연회에 불렀다는 건가.
「 저, 저기, 말씀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저는, 노미야 유리코입니다. 오늘은 와주셔서 영광이예요 」
「 어머나…… 후후후! 귀여운 아가씨네요 」
「 저…… 쿄코 님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는 분이신지…… ? 」
「 그래요, 당신의 어머님인 시게코 님과는 잘 지내고 있어요. 다회나 연극에 함께 가기도 하죠 」
「 아…… 그렇군요 」
「 …… 그렇지만, 있죠, 당신도 만났던 적이 있어요 」
「 에…… 」
「 날 기억하고 있어? 유리 씨 」
유리코는 조급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만났다면 잊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쿄코 부인의 모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 …… 후후후. 뭐, 괜찮아요. 난 귀여운 게 아주 좋은 걸. 당신같은 아가씨라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고 말아요 」
「 죄, 죄송합니다…… 」
「 …… 후후…… 」
「 ??? 」
「 오호호! 미안해요, 농담이야 」
「 노, 농담? 」
「 후후…… 그냥, 당신의 곤란한 얼굴이 보고 싶었어요. 나야 물론 당신을 알고 있지만, 당신은 날 몰라요.
여기에 잠깐 시게코 씨를 찾아왔을 때, 가끔 당신이 정원에서 활기차게 노는 걸 본 정도예요. 그 다음엔 사진을 보거나 」
「 아…… 그, 그랬군요. 하, 하지만 제가 손님이 오셨을 때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니…… 」
「 우후후. 괜찮아요, 그런 것보다도…… 」
쿄코는 유리코에게 불쑥 다가섰다.
쿄코의 풍만한 가슴에서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달콤한 향기가 피어 올랐다.
「 좋은 냄새구나, 유리 씨…… 소문은 사실이었군요 」
「 에…… 소문…… ? 」
「 당신의 몸에서 피어나는 향기가 마치 백합처럼 관능적이라는 거 말이예요…… 」
「 !! 」
그 말에 유리코는 머리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 그 날엔 향기가 더욱 짙어진다면서요. …… 지금 그 날인 걸까? 」
「 …… 그, 그건…… 」
「 어머, 쿄코 씨! 잘 와주셨어요! 」
그때, 유리코에게 있어서 절묘한 타이밍으로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의 인사가 신호가 된 것처럼 유리코는 쿄코에게 등을 돌려 그 자리를 총총히 떠났다.
「 어머, 유리 씨…… 」
「 정말, 저 애도 참. 미안해요, 실례를 저질러서…… 」
「 후후…… 괜찮아요. 나, 아가씨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아주, 말이죠 」
유리코는 드레스의 자락을 잡아 당긴 채 걸으며 가슴을 크게 헐떡였다.
끝없이 인사하고 입에 발린 말을 걸어오는 주위 손님들에게 의젓하게 거짓 미소를 짓는 게 고작이었다.
부끄러워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소문.
이 싫은 향기의 소문.
유리코는 특수한 냄새의 소유자였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그 때는 그게 한층 강해진다.
다른 이들이 맡기에는 그건 백합과 비슷한 향기라고 한다.
스스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런 상스러운 것이 소문이 되어 호기심에 어린 눈으로 보는 게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오늘 밤 모인 손님들도 그 소문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유리코는 기둥의 그림자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살며시 눌러서 얼마 안 되는 땀을 닦았다.
「 어이…… 왜 그래, 유리코 」
히데오가 글래스를 한 손에 들고 의아한 얼굴로 다가온다.
유리코는 생각지도 못하게 말을 걸어온 데 깜짝 놀라 손에 든 손수건을 가슴 앞에 꽉 움켜쥐었다.
히데오는 그 모습을 보고 얼핏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그…… 아까는, 미안했다 」
「 에…… ? 」
「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어. …… 잊어줘 」
한순간, 무슨 소린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가까스로 히데오가 이 집을 매도했던 말을 떠올린 유리코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 괜찮아, 신경 안 써 」
「 그런가. …… 그렇다면 괜찮지만. 너, 아까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라서 」
「 …… 틀려. 히데오 씨의 말 때문이 아니야 」
「 에? 」
유리코는 가만히 히데오의 곁에 다가섰다.
히데오의 군복에 뺨을 묻듯이 얼굴을 숙였다.
「 히데오 씨…… 나, 보통과 어딘가 다른 걸까…… 이상하지는 않은 걸까 」
「 아, 아니. 그렇지는 않아. …… 펴, 평소보다는 아름다워 」
지금은 마침 월경이 시작되기 직전.
향기가 짙어져 버릴 무렵이다.
히데오는 거길 건드린 적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였던 탓에 익숙해져 버렸을 뿐은 아닐까.
( 히데오 씨. 역시 날 데리고 여기가 아닌 어디론가 가주지 않을래 )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목 안으로 삼켰다.
결벽한 성격인 히데오의 청결한 비누 향기.
공연히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 하아…… 」
연회장에서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가볍게 이야기나 춤의 상대를 한 뒤, 바람을 쐬고 싶다며 정원으로 나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오늘 밤의 목적을 들은 뒤부터 남자들의 시선이 온 몸에 휘감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향기를 맡으려는 것만 같았다.
유리코는 자신의 몸을 꽉 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사부로의 거친 체취.
남자는 다들 저런 동물 같은 냄새가 나는 걸까.
히데오는 달랐다. 청결한 향기다.
오빠도 다르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가끔 화류계 여자의 냄새는 나지만.
후지타는 아마도 과자의 냄새가 날 것이다.
하지만 낯선 남자들은 모른다.
유리코는 자신을 여자로 보는 남자들에게서는, 전부 사부로처럼 짐승 같은 냄새가 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 결혼…… 아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지금만큼은…… )
유리코는 비틀거리며 정처없이 정원을 방황했다.
멋진 비모란(緋牡丹)이 초저녁의 어두움 안에서 타오르는 듯이 피어 있었다.
지금 이 저택 내에서 싱싱하게 흐드러진 것은 이 꽃들 뿐이다.
( 나는…… 몰라…… )
자신은 무엇인 걸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 외엔 가치가 없는 존재인 걸까.
사실 그럴 것이다.
직업 여성, 여류 작가 같은 여성의 활약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이 시대에서도 결국 여자는 집 안에 있는 것이다.
유리코 같은 화족 아가씨라면 더욱 더 그렇다.
고귀한 신분의 부녀자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 따윈 무엇보다 수치스러운 일.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 따윈 아무것도 없다 ――――
「 …… 부인? 기분이라도? 」
「 ! 누구…… 」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유리코는 과잉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낯익은 인물이었다.
「 아…… 공주님…… 」
「 …… 아아, 마지마…… 너였구나…… 」
유리코는 마음이 놓여서 무심코 그 자리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 아아, 그래…… 마지마도 저런 짐승 같은 냄새는 안 나 )
마지마에게서는 태양과 풀과 꽃들의 상쾌한 냄새가 났다.
유리코는 그때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혹시 자신의 남자에 대한 인상은 그 냄새에 의한 걸 지도 모른다.
그것은 스스로가 특수한 체취를 갖고 있기 때문인 본능인 걸까.
「 공주님, 혼자 이런 데 있어도 괜찮으십니까? 」
「 아…… 그러게.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
「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
걱정스러운 듯 유리코를 바라보는 마지마.
유리코는 그 시선에 가슴의 고동이 커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돌아가려던 참이니까 」
「 아…… 공주님, 다리에 진흙이…… 」
「 에? 아, 정말…… 이리저리 서성거렸더니 」
「 …… 그래서는 돌아가실 수 없겠죠.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
「 엣! 」
마지마의 제안에 유리코는 동요했다.
남자가…… 마지마가 다리를 씻겨 주다니…… 그렇게 불미스러운 짓을 해도 되는 걸까?
「 돼, 됐어! 난 언제나 흙투성이였으니까 」
「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밤은 손님도 가득 계시고 중요한 날이잖아요. 안 됩니다, 그대로는 」
「 그, 그렇지만…… 」
「 금방 끝나요. 아가씨를 진흙투성이로 돌려보내면, 제가 주인님께 야단맞아 버립니다 」
선택지 - 3
고마워
부끄러워
「 그치만…… 부끄러워 」
「 에?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발코니에서 뛰어 내리려던 분이 」
「 으, 윽!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나도 일단은 여자니까 말야! 」
「 공주님…… 」
마지마는 훗하며 미소지었다.
「 부끄러워 하실 일 같은 게 아닙니다. 전 사용인이니까…… 공주님 다리의 진흙을 터는 건 제 역할입니다 」
「 …… 마지마 」
주저없이 자신을 사용인이라고 하는 마지마에게, 유리코의 가슴이 조금 아팠다.
하지만 그건 사실인 것이다.
마지마는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다.
유리코는 체념한 것처럼 시선을 떨궜다.
「 응, 그렇네. …… 알았어. 고마워 」
유리코는 사용인 중에서 마지마를 대할 때만은 솔직해질 수 있었다.
철면피인 후지타 앞에서는 어쩐지 긴장해버리고 다른 자들에게도 완전히 마음을 놓는 일은 없었다.
하물며 사부로 같은 남자에 대해서는 혐오감밖에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지마만큼은 달랐다.
어째선지 만났을 때부터 마지마의 곁에 있으면 숨을 쉬는 게 아주 편했던 것이다.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다고나 할까, 마치 오랜 시간을 같이 살아온 가족 같은 감각마저 있었다.
「 공주님, 이리로 」
「 응 」
살며시 내민 마지마의 손바닥에 유리코는 끌어 당겨지듯이 손을 올렸다.
보통 가족 이외의 남자에게 손을 잡히는 데 저항이 있을 터인데, 역시 마지마에겐 왠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동시에 서서히 가슴을 조여오는 듯한, 뭔가 달콤한 기분이 든다.
유리코는 뺨이 희미하게 상기되는 걸 느끼며 마지마에게 이끌려 정원을 뒤로 했다.
스샷
마지마는 유리코를 의자에 앉히고 대야에 물을 채워서 발을 담그게 했다.
부지 내에 있는 사용인들이 사는 이 약간 떨어진 곳에는 마지마나 사부로를 위시해 여러 사람이 살고 있다.
노미야 가 일체를 관리하는 집사인 후지타만은 저택 내에 살고 있었다.
후지타를 교육한 선대 집사가 죽고 나서 후지타는 가계를 절약하기 위해 고용인 몇 명을 내보냈다.
그 이후로 유리코는 이 곳이 조금 적적하고 살풍경해졌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자주 놀러와 하녀들이 상대해줬지만, 지금은 그런 일도 없어졌다.
그 무렵의 소란스럽고 즐거운 분위기는 이제 여기엔 없다.
「 공주님, 차갑지는 않으십니까? 」
「 응, 괜찮아. 춤추느라 다리가 좀 달아올라 있었으니까 딱 좋아 」
「 오늘 밤은 아주 호화로운 무도회네요. 저도 공주님의 춤을 보고 싶습니다 」
「 싫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서투르니까 보여줄 수 있을만한 건 아니야 」
「 그렇습니까? 하지만 공주님, 몸을 움직이는 건 잘 하시잖아요? 」
「 그렇긴 한데…… 그래도, 춤추는 건 안돼. 나 우아함이나 기품이 부족한 거 같거든.
어머님도 자주 한탄하셔. 화족 영애가 이렇게나 말괄량이라니, 라고 」
「 아하하! 으음─ 그런가…… 그래도 틀림없이, 실은 잘 하실 거예요. 공주님께선 부끄러우신 것 뿐입니다 」
「 정말…… 아는 것처럼 말하긴…… 」
마지마의 손바닥은 조경이나 힘을 쓰는 일을 하는 데 비해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다정하고 정중하게 종아리 부근까지 어루만져져서 유리코는 열을 견디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 마지마가 만지는 건 하나도 싫지 않아…… 어째서일까 )
그 손가락이 닿은 피부는 저린 것처럼 움찔움찔하며 욱신거렸다.
마지마가 가까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유리코는 이 모습이 이상하지는 않을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언제부터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된 걸까.
꽃을 잘 아는 마지마와 수다를 떠는 게 즐거워서, 함께 보내는 동안 그 온화하고 다정한 공기에 안심하게 되었다.
마지마는 단정한 외모였기에 그를 본 여성은 적지 않게 호의를 갖는 것 같았다.
유리코도 하녀들이 마지마의 얘기를 하는 걸 여러 번 들었던 적이 있다.
조금 전 엿들어 버린 대화는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노골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얘기가 귀에 들릴 때마다 어딘가 어둡고 무거운 마음이 싹텄지만, 마지마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 사실에 어째선지 안심하고 있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유리코 자신도 깨닫고 있었다.
( 그래, 틀림없이 이게…… 사랑이라는 건지도 몰라 )
실은 한참 전부터 자각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족과 사용인이라는 신분 차이가 유리코에게 그 마음을 깊이 생각하는 걸 거부하게 했다.
왜냐면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괴로울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게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 이대로 그 무도회에 돌아가면…… 내 장래는 이제, 정해져 버릴 지도 몰라…… )
그렇게 생각하자 차츰차츰 초조함이 짙어진다.
이 마음을 마지마에게 고백할 때라면…… 지금밖에 없는 게 아닐까?
선택지 - 4 ( 앞서 전 루트를 클리어 했을 경우만)
말한다
말하지 않는다 -- 눈물을 머금고 클릭 ;ㅅ;
( 역시…… 말할 수 있을 리 없어…… )
한순간 스친 생각을, 유리코는 부정했다.
( 여기서 마음을 전해도, 마지마는 곤란할 뿐인 걸…… )
유리코는 마음 속을 털어놓고 편해질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마지마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마지마가 자신을 성가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유리코에게 있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지금까지도 될 수 있는 한 노골적으로 연심을 드러내지 않게 마음을 억눌러 왔던 것이다.
이제와서 그걸 고백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 공주님…… 공주님? 」
「 에? …… 아 」
생각에 깊이 잠겨있던 유리코를 마지마의 목소리가 현실로 되돌린다.
어느새 유리코의 다리에 묻은 진흙은 깨끗하게 씻겨져 물방울을 닦아낸 뒤였다.
「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기분이 안좋으신 건? 」
「 아니,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 뿐이야. 아무렇지도 않아 」
「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돌아가시죠. 틀림없이 주인님도 공주님을 찾고 계실 겁니다 」
「 …… 그렇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
마지마의 곁에서 그 저택의 안으로.
그건 유리코의 마음을 삐걱이게 하는 괴로운 길이었다.
여길 이대로 떠나는 건 처음으로 싹튼 달콤한 연심을 스스로 감춰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택으로 향한 길을 마지마와 함께 되돌아가자 근처에서 오빠, 미즈히토의 목소리가 났다.
「 유리코? 어디에 있는 거야, 유리코 」
「 오라버니다…… 」
「 공주님을 찾으러 오셨겠죠. …… 그럼, 전 여기서 」
「 …… 응, 그래. …… 고마워, 마지마 」
마지마는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유리코의 앞에서 사라졌다.
바로 그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미아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마지막인 것이다 ―――― 지금 당장 시집을 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 비극적인 감정이 밀려왔다.
「 유리코…… ? 아아, 이런 데 있었구나 」
「 오라버니…… 죄송해요, 찾게 만들어 버려서 」
「 하하하. 괜찮아, 너도 지쳤겠지. 오늘 밤의 손님들은 다들 수다스러우니까.
그래도 네가 없으면 저택은 향기를 잃은 꽃이나 마찬가지야. 자, 돌아가자 」
「 …… 오라버니…… 」
어깨를 안겨 걸음을 재촉당했지만, 유리코의 다리는 너무도 무거웠다.
상태가 이상한 여동생에게 미즈히토는 고개를 기울였다.
「 왜 그래, 유리코. …… 뭔가 싫은 일이라도 있었어? 」
「 아뇨…… 틀려요 」
「 그럼, 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지? 」
「 ………… 」
「 유리코 」
미즈히토는 유리코의 바로 앞으로 돌아서서 그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뭔가…… 고민이 있어? 」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오빠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유리코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테니까, 털어놔 보렴 」
선택지 *
집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
「 …… 결혼에, 대해서…… 」
「 결혼? 난 아직 결혼 같은 건 안 할 건데? 」
「 아, 아뇨. 오라버니가 아니라…… 」
「 …… 너의? 」
유리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 …… 오라버니도 알고 있겠죠…… 오늘 밤은 날 위한 상대가 초대되었다는 걸…… 」
「 …… 유리코. …… 대체 누구한테 그걸 들었어? 」
그 질문에 유리코는 입을 다물었다.
히데오라고 말하면, 집안끼리 관계가 나빠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 …… 뭐, 됐어. 그래도 이건 행복한 일이야, 유리코. 전부 널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계획한 거니까 」
「 네에…… 그건, 알고 있어요…… 」
「 유리코…… 혹시…… 너,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건? 」
「 ! 」
오빠의 예리함에 유리코는 숨을 삼켰다.
화류계에서도 유명한 오빠다.
연애에 관한 거라면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노련하다.
숨기려 해도 유리코 같은 소녀의 마음 따윈 꿰뚫어보는 것이다.
「 역시, 그랬구나 」
「 ………… 」
「 사랑이라는 건 말이지…… 유리코. 한순간, 밤하늘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불꽃과도 같은 거란다.
어차피 흔적조차 없어져 버리는 덧없는 거야.
만약 네가 그 사랑에 자신을 내던지려 한다면…… 난 말리지 않겠어. 하지만 그 행복이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
「 오라버니…… 」
챙그랑!
「 !? 」
「 꺄…… 」
느닷없이 어둠을 꿰뚫는 어수선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아한 음악과 웃음 소리가 끊어지고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
「 어, 어쩌죠, 오라버니…… ! 」
「 가보자. …… 유리코, 절대 내 곁에서 떠나지마 」
「 네, 네! 」
남매가 저택으로 돌아가자 그 곳은 벌집을 쑤신 듯한 대소동이었다.
화려한 무도회에 어울리지 않는 삼엄한 남자들이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마구 날뛰고 있었다.
서둘러 돌아온 두 사람은 그 광경에 말을 잃고 자기 눈을 의심했다.
「 이, 이건 대체…… 」
「 오라버니…… 저, 저 남자들은…… !? 」
비명과 욕지거리, 도망치려고 갈팡질팡하는 치장한 부인들, 칼부림에 쓰러진 남자들……
「 너희들은 뭘 가만히 서 있는 거냐!? 빨리 도망쳐라!! 」
「 히데오 씨…… 」
눈을 부릅뜨고 핏대를 세운 히데오가 분노한 표정으로 달려 온다.
하데오도 손에 뽑아 든 일본도를 움켜쥐고 있다.
도신을 물들인 생생한 핏자국이 남자들과 칼부림을 했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 히데오 군, 저 폭도들은 누군가!? 」
「 불량배다! 반정부(反政府)인 불량배들이 귀족원의 요인을 노리고…… 」
「 썩어빠진 귀족원의 악인들에게 철퇴를 ── !! 」
「 지금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천벌을 내릴 때다 ── !! 」
거친 노성과 함께 폭한들이 마구 날뛴다.
유리코는 이 상황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들의 목적은 정부의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오늘 밤 노미야 가가 이 저택에 권력자들을 초대했기 때문에 노려지고 만 것이다.
「 큭! 이 무슨…… 경찰에 통보는 한 건가! 」
「 진작 한 것 같지만 아직 안 왔다! 제길…… 너희들은 빨리 여길 나가라, 알았나!? 」
히데오는 핏발 선 눈으로 다시 난투가 벌어진 가운데로 뛰어들어 갔다.
아비규환의 아수라장 속에서 유리코는 망연히 서 있었다.
화려했던 연회는 이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탁자는 쓰러지고 바닥은 흙투성이, 찢어진 커튼, 깨진 유리……
「 …… 너무해…… 」
아버지가 혼신을 다해서 만들어 낸 이 야회가 폭한들에게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유리코의 눈엔 뜨거운 눈물이 넘쳐흐르고 머리는 분노로 새하얗게 되었다.
「 유리코? 어이, 유리코! 어디 가는 거냐!! 」
생각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오빠의 말을 듣지 못한 유리코는 불량배와 적대하고 있는 히데오의 옆을 빠져나가 홀의 중앙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멈춰, 유리코…… 」
이 집을 더럽히는 건 어떤 사람이든 용서하지 않는다.
자상한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인 이 야회를 망치는 건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다!
「 나가요!! 이 야만인! 」
유리코는 소리쳤다.
눈물에 젖은 절규였다.
「 여기엔 당신들이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
「 안 돼, 유리코!! 」
「 에잇! 여자 주제에!! 」
멀리서 오빠의 목소리가 울리고 근처에서 남자가 굵고 탁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 방해하지 마라!! 제국의 고름이!! 」
「 …… 읏 」
「 큭!! 유리코!! 」
무서우리만치 날카롭게 빛나는 칼이 머리 위로 치켜 올려진다.
유리코는 그 순간에 삶의 마지막을 각오했다.
( 난…… 태어난 날에 죽는구나 )
생일인 이 밤에.
유리코를 훌륭한 가문에 시집을 보내기 위해 열린, 호화로운 야회의 이 홀에서, 자신은 일본도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 아버님…… 죄송해요…… )
결국 무엇 하나도 효도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마음은 짓밟힌 채로 자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산화하는 것이다.
분하다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분하다.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한 채 …… 애처로운 자작 영애로 나는 인생을 끝낸다 ―――― .
「 크악!? 」
「 이봐, 여자에게 칼을 들이대다니 무슨 짓이냐 」
「 !? 」
유리코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무심코 자신의 몸을 끌어 안는다.
살아 있다.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기운이 빠진 몸은 중심이 사라진 것처럼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그러자 강인한 팔에 꽉 껴안긴다.
나사(羅紗)의 감촉. 그리고 궐련과 오드콜로뉴의 진한 향기.
cg * 시바
「 이런…… 괜찮은가? 아가씨 」
「 아…… 」
유리코는 처음으로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보았다.
눈 앞에 있는 건 본 적이 없는 훌륭한 남자였다.
키는 후지타에겐 미치지 못하겠지만, 상당히 크다.
탄탄한 몸에 멋들어진 양복을 입고 파나마 중절모를 쓴, 패션을 잘 모르는 유리코가 보기에도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그 눈이다.
자신감으로 충만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오만하다고 할 정도로 강하게 빛나는 눈.
유리코는 그 강압적인 힘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이 혼란이 한창인 와중,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침착한 남자의 공기에 유리코는 얽매여 있었다.
「 아, 저, 전…… 」
「 걱정할 거 없어. 자, 겨우 경찰들이 왔다 」
남자의 말에 유리코는 소동이 수습되고 있는 걸 알았다.
저택에 많은 경찰이 몰려와 불량배들이 뿔뿔이 흩어져 간다.
( 아아…… 나, 살아났어 )
처음으로 그 기쁨을 가슴으로 느끼며 유리코는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없이 소동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버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던 걸까.
「 유리코! 상처는 없어!? 」
미즈히토가 안색이 변해 유리코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여동생을 껴안은 남자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태연하게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 아가씨는 무사합니다. 보시다시피 」
그때 유리코는 자신이 아직도 남자의 가슴에 안긴 채라는 걸 깨닫고 당황해서 몸을 떼어놓았다.
지나친 기세에 비틀거리자 그 바로 옆에 히데오가 벌레를 씹은 듯한 얼굴로 서서 유리코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오빠와 소꿉친구 앞에서 낯선 남자에게 얌전히 안겨 있었던 건가.
유리코는 부끄러워서 뺨을 붉혔다.
「 …… 흠. 이제 야회를 계속할 상황은 아니군. 소동도 잦아든 것 같고…… 돌아가기로 할까 」
「 저, 저기…… ! 」
선택지 *
고마워요 --
당신은 누구?
「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정말…… 」
「 …… 됐어. 그 정도는. 별 거 아니다 」
「 아뇨, 그런! 당신은 제 생명을 구해주셨는 걸요 」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
「 엣…… ? 」
유리코의 곤혹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표표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옆에 있던 히데오에게 눈을 두었다.
「 …… 좋은 부분을 빼앗아 버려서 미안하군, 당신 」
「 읏…… 무슨 소린지…… 」
「 훗. …… 그럼 아가씨, 다음에 또 」
「 에? 아…… 」
결국 남자는 이름도 대지 않은 채, 소동의 열기가 아직 남은 와중에 서둘러 모습을 감춰 버렸다.
「 뭐야, 저 녀석은…… 」
「 유리코, 네가 아는 사람인가? 」
「 아, 아뇨…… 처음 뵙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
「 공주님!! 」
그때 안색이 변한 마지마가 홀로 뛰어들어 왔다.
「 무사하셨습니까!? 」
「 으, 응, 나는…… 넌 괜찮아? 」
「 네, 그저 수상한 무리가 갑자기 정원을 가로질러서 도망치는 걸 보고 저택에서 뭔가 일어난 것 같아서…… 」
「 흥…… 경찰이 정문으로 밀어 닥쳤으니 담을 넘어간 거로군 」
「 에, 경찰! 」
「 마지마, 끔찍한 소동이 있었어. 하지만 이제 끝났다. 넌 후지타의 지시에 따라서…… 」
「 싫어어어어어 ──── !! 」
갑자기 어머니의 비명이 저택의 공기를 갈랐다.
유리코, 마지마, 히데오, 미즈히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마주보며 숨을 삼켰다.
「 지, 지금 건…… 어머님…… ? 」
「 네, 마님의 목소리입니다 」
「 무슨 일이 있는 건가 」
「 가자, 유리코! 」
「 아아, 여보, 여보…… 」
거기엔 경찰 몇 명과 후지타가 서 있고, 어머니 시게코가 바닥에 주저앉아 뭔가에 매달려 울고 있었다.
원의 중심에 있는 건 인간의 몸이다.
누군가 쓰러져 있다.
그리고 유리코는 그 슈트와 구두를 본 기억이 있었다.
「 아…… 아버님…… 」
유리코는 자신의 말을,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거기엔 이미 숨이 끊어져 창백해진 아버지의 ──── 시체가 누워 있었다.
양탄자에는 끈적끈적하게 검은 피의 얼룩이 번져 있고 그 잿빛 피부에는 피가 튄 자국이 처참하다.
살아있지 않다는 것 따윈 용이하게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눈을 멀거니 크게 뜨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죽은 걸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다.
「 …… 아버님…… 왜…… 정치와 관계 없는 아버님이……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오빠의 말을, 유리코도 마음 속으로 반복한다.
아버지는 분명히 이 저택의 가장이지만, 그 불량배들의 목적은 귀족원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노미야 자작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의원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사람을 착각한 걸까.
혹은 누군가를 감싸다가 베인 걸까.
왜? 어째서?
그런 의문만이 떠오른다.
( 대체 어떤 이유로, 아버님이 살해당해야 하는 거야!? )
「 …… 유리코…… ! 」
비틀거리는 몸을 오빠가 떠받쳐 준다.
「 미, 미안해요…… 오라버니…… 」
「 정신 차려, 유리코…… 」
「 네…… 」
분노와 슬픔, 놀라움과 공포로 아직 현실감이 없다.
정신을 차리자 이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어깨를 안은 오빠의 손바닥이 따뜻하다.
그러나 그 온기에 더욱 더 슬픔이 밀려왔다.
이제 아버지에게는 이렇게 안길 일도 없는 것이다…… 영원히.
「 음…… ? 뭐야, 이건 」
문득 히데오가 의아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작의 시체 위로 몸을 구부리고, 그 손이 쥐고 있는 꽃을 지그시 바라본다.
「 무슨 꽃이지…… 」
「 …… 도라지(桔梗 : 키쿄우) 입니다 」
경직된 목소리로 마지마가 말했다.
「 그렇지만, 왜 주인님께서 도라지를 쥐고 계신 걸까요…… 」
( 도라지…… ? )
확실히, 살펴보니 자작은 손에 푸른 꽃을 꽉 쥐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그 꽃을 꺾은 것일까?
선택지 *
후지타에게 묻는다 --
마지마에게 묻는다
「 …… 저기, 후지타 」
「 네 」
「 오늘 밤, 저택 안에 이 꽃을 장식했어? 」
「 아뇨…… 아닐 겁니다. 저도 이 꽃을 이 저택에서 본 건 처음입니다 」
이런 상황에서도 후지타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침착했다.
그러나 저택 안에 없었다면 자작은 대체 어디서 이 꽃을 손에 넣은 걸까……
「 !! 도, 도라지…… 」
핫하고 뭔가 생각해 낸 듯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 어머님…… ? 」
「 그, 그런…… 그런, 설마…… ? 」
어머니, 시게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진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보랏빛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 마님, 방에서 쉬시는 편이 」
「 시, 싫어…… 무서워…… 혼자는 싫어…… 살해당해 버릴 거야…… !! 」
「 어머님, 진정하세요. 이제 그 불량배들은 떠났습니다 」
「 아니, 아니야…… 아아, 무슨 짓을!! 왜 지금에 와서…… 아아, 싫어, 무서워!! 살려줘, 살려줘어엇!! 」
「 누가! 누군가, 의사를 불러라!! 」
반쯤 미쳐서 실성한 것처럼 날뛰기 시작한 시게코를 억누르며 후지타가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이상해진 어머니를, 유리코는 오빠에게 안긴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처참한 소동 한 가운데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는 아버지의 시체.
피 냄새.
경찰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색.
흐느끼는 울음 소리.
( 아버님…… 이건, 뭘까요…… ? 유리코의 생일은 대체 어떻게 되어버린 거죠…… ? )
마치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 ──── .
절망의 밤으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 정도로 참사로 노미야 가에 뭔가가 크게 변했냐고 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당주가 아버지, 야스유키에서 오빠, 미즈히토로 바뀌었을 뿐이다.
당연히 결혼 얘기 같은 것도 없어졌다.
그 밤 그대로 실성해 버릴 것 같았던 어머니, 시게코도 여느 때처럼 연극이나 다회에 나가 흥청거리며 살고 있다.
뭔가를 뿌리치려는 것처럼 그 행동은 점점 더 심해져서 가계를 돌보지 않는 것도 여전하다.
당주가 된 미즈히토도 변함없이 염세적이고 향락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가를 짊어진 몸이 됐다는 자각은 보이지 않고 그저 매일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내며 어딘가 아득한 눈으로 한숨을 쉰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 되면, 꽃꽂이를 가르치러 간다며 거리로 사라져서 이른 아침에 술과 백분 냄새를 풍기며 훌쩍 돌아온다.
후지타 역시 여전히 무표정으로 부지런히 재정을 정리해서 팔리는 건 다 팔아버리고 절약해야 하는 건 절약하며, 어떻게든 이 집을 존속하게 만든다.
지난 날 메이지 시대의 가업 폐지로 쓰라린 경험을 한 뒤부터 근근히 연금으로 살아갈 뿐인 나날이었으나, 그래도 아버지가 있었을 때는 집안이 밝았다.
자상한 아버지가 있고, 화려한 어머니가 있고, 아름다운 오빠가 있고, 여러 명의 사용인들이 있고……
잃어버리고 나서야 처음 알게 된, 사소한 행복이었다.
( 난 충분히 행복했었구나…… )
그래, 자신은 행복했던 것이다.
유리코는 슬픔과 더불어 그걸 자각했다.
비록 가난했을지라도 가족이 있고 미소가 있다면 그곳에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유리코는 어딘가 빈 껍데기처럼 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매일 저택 내에서 멍하니 있는 것보다도 적어도 조금이나마 일하러 나가고 싶었으나 오빠나 후지타가 반대했다.
왜냐하면 화족 부녀자가 일하는 것은 품행이 나쁜, 창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유리코에게 일할 만한 기력은 아직 되돌아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창문에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곳에 마지마의 모습이 보였다.
유리코는 문득 마지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죽은 뒤로 쭉, 누군가와 별 생각 없이 수다를 떤 기억이 없다.
마음을 먹은 것과 동시에 유리코는 휙 방을 나갔다.
지금은 같이 있으면 안심할 수 있는 누군가와 평온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방을 나온 그 순간, 들떠있던 급한 마음은 무겁고 어둡게 변했다.
「 사, 사부로…… 」
뜻하지 않게 만난 그 모습에 유리코는 흠칫 놀랐다.
문을 열자 바로 옆에 사부로가 검은 그림자를 품고 서 있었던 것이다.
가슴 속이 스윽하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나 아버지가 없어진 뒤부터 사부로는 예전보다 자신에게 거리낌이 없어진 것 같았다.
사부로는 그 밤에 솔선해서 손님들을 폭한에게서 지켰다고 칭찬 받아, 몇 사람에게서 약간의 돈까지 받았다고 한다.
주인인 자작을 지키지 못했는데 무슨 포상(원문은 御扶持)이냐고, 유리코는 괘씸한 마음이 가득했다.
「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
「 아…… 후지타 님께서 공주님을 부르러 가라고 하셔서…… 」
「 에, 후지타가? 」
「 예에. 웬일인지, 손님이 오신 것 같으므로 」
손님.
대체 누구일까?
사건 직후는 한동안 어수선했지만, 요즘에는 계속 조용한 나날이었다.
그 평온을 깨뜨리는 것 같아서 유리코는 약간 불안해졌다.
당주인 오빠는 어젯밤의 외출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필 이럴 때, 라고 유리코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 …… 알았어. 바로 갈게 」
유리코는 복도를 막아선 사부로를 피해 응접실로 향했다.
시야의 끝에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는 사부로의 모습이 비친다.
마치 옷깃의 틈으로 목덜미를 타고 맨살을 끈적하게 구석구석 핥는 것 같다.
유리코는 혐오감으로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없는 이 저택에서 대체 누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걸까.
흡사 알몸이 되어버린 듯한 공포심에 떨리는 입가를 소맷자락으로 누르며, 유리코는 종종걸음으로 응접실을 향해 서둘렀다.
「 유리코입니다 」
「 어서 들어오십시오 」
조용히 응접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실내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유리코는 억누르지 못하고 '앗'하는 소리를 질렀다.
「 당신은…… 」
「 여어. 오래간만이군요 」
긴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던 인물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건 그날 밤, 유리코를 불량배에게서 구해준 이름 모를 남자였다.
유리코는 너무 놀라서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후지타를 돌아보았다.
「 후지타…… 대체, 이 분은…… 」
「 …… 시바 쥰이치 님이십니다. 마님께서 친하게 지내시는 백작의 친구 분으로…… 일전의 야회에도 참석하고 계셨습니다 」
「 으응, 물론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내겐 이름도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 걸 」
「 그래서 말했잖아. 곧 다시 만날 수 있다고 」
「 하지만, 왜…… ? 」
「 …… 유리코 씨. 그 야회는 상당히 떠들썩했었지 」
느닷없이 시바가 거만한 어조가 된다.
그 변화에 유리코는 숨을 삼켰다.
「 악단에, 일류 요리사에, 여흥을 위한 기녀에, 많은 사용인…… 돈도 꽤나 들었을 것이다 」
「 …… 무, 무슨, 갑자기 」
「 들어보라고. 거기 혼혈 집사한테, 이 집의 상황을 말이야 」
유리코는 갑작스러운 재정 얘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후지타를 올려다 보았다.
유리코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후지타의 철면피에 미약한 동요가 번진다.
「 후지타…… ?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나한테, 돈에 대해서 물어보라는 거야…… ? 」
「 …… 공주님. 이런 이야기는 공주님께 할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공주님과 깊은 관계가 있는 얘깁니다 」
「 엣…… 나…… ? 」
「 그래, 유리코 씨. 당신의 문제다 」
시바는 그렇게 단언하고 품에서 궐련을 꺼내 불을 붙여 들이 마신 뒤 연기를 내뿜는다.
「 이 집은 이제 버틸 수 없어. 머지않아 도산하게 될 거야 」
「 ! 그, 그런…… 」
도산. 그건 파산이라는 것이다. (원문 : 身代限り / 破産 )
그렇게 화족의 체면도 격식도 유지할 수 없게 된 가문은 작위를 반납하게 된다.
( 아버님이 지켜오신 이 집이 끝나버린다는 거야…… ? )
「 선조부터 대대로 이어온 토지를 팔고, 권리도 팔고, 여기저기 부채까지 진데다 빚을 갚을 가망도 없다.
남은 건 이 저택과 골동품 약간 뿐…… 하지만 그것들을 돈으로 바꿔봤자 부채는 사라지지 않아. 그렇지? 거기 너 」
「 …… 유감스럽습니다만 」
「 즉, 그런 거다. 부채는 불어나기만 하고 등 뒤는 낭떠러지. 그런 상황인 거지, 이 집은 」
「 …… 당신은 대체, 어디서 그렇게 이 집에 대해서 조사하신 거죠 」
유리코는 갑자기 나타나 거만하게 이 집의 재정에 함부로 파고 드는 시바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남의 집안 내정을…… 」
「 그건 실례. 규모가 큰 장사를 하고 있어서 말야. 어떤 정보든 손에 들어오지 않는 건 없다.
…… 그나저나 정말, 화족이라는 것들은 어쩔 도리가 없군 」
담배 연기 너머로 시바는 눈을 가늘게 떴다.
「 아무리 가난해도 바로 그 본인들은 일도 안하고 우아하게, 나태하게 살고 있어.
나라에서 응석을 받아 준 결과다. 생활 능력도 없으면서 사치를 하고 싶어하는 무리야. 구제불능이지 」
「 …… 그렇게 말하지 마! 」
「 왜냐. 사실이지 않은가 」
「 시바 님…… 아직 선대 주인님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부디…… 」
「 아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 밤의 사망자는 자작 한 사람이었군 」
「 엣 」
「 시바 님!! 」
「 음? …… 왜 그래. 설마, 아가씨한테는 말하지 않았던가 」
후지타는 좀처럼 내지 않는 노성을 손님을 향해 내질렀다.
유리코는 지금 처음 듣는 사실에 정신이 아찔했다.
( 돌아가신 건…… 아버님 뿐, 이라고? )
그 불량배들의 목적이던 귀족원의 인간은 누구 하나 살해당하지 않고 죽은 것은 겨우 자작만이었다는 건가.
「 후지타…… 그랬었어…… ? 」
「 …… 네. 아가씨…… 」
「 그, 런…… 」
대체 이 세상은, 이 집을 어디까지 불행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슬픔이나 분노를 넘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 …… 그렇게 절망적인 얼굴 하지마, 유리코 씨 」
어느샌가 스스럼없는 말투밖에 쓰지 않는 시바를, 유리코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그날 밤, 확실히 이 남자가 목숨을 구해 주었다.
하지만 이토록 지독한 사실을 들은 뒤로는 어딘가 자신을 깔보는 태도 같다는 생각을 누를 수 없다.
「 그렇지만 당신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절망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일을 」
유리코는 저도 모르게 반항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 대체 당신은 뭘 하러 온 거야. 이 집을 비웃으러 온 거겠죠! 」
「 유리코 씨…… 그건 아니야 」
「 그치만 당신은 이 집이 곤궁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 분수도 모르고 야회를 열었다고……
그날 밤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
유리코는 스스로 소리를 지르면서 점점 더 비참해지는 걸 느꼈다.
「 네, 그래요, 나도 알고 있었어. 부채를 늘리고 무리해서 그렇게 호사스러운 야회를 열다니…… 무서웠어요. 너무 불안했어.
그렇지만 그건 아버님의 자상함이었던 거예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아버님은…… 자신의 근심을 늘려서라도 날 행복하게 해주시려고…… 」
유리코는 가슴이 벅차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에게는 아버지의 애정일지라도 타인이 보기엔 단순히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아 보일까.
하지만 어리석으면 어리석은만큼, 비참하면 비참한만큼, 유리코는 아버지가 그리워져서 슬퍼졌다.
「 공주님…… 」
후지타가 견디기 힘들다는 얼굴로 유리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유리코는 자기도 모르게 후지타의 가슴에 매달려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리코는 이 무례한 손님 앞에서 눈물만큼은 보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격정을 참는다.
후지타는 그걸 헤아렸는지 잠자코 유리코에게 가슴을 내주었다.
이윽고 시바가 천장으로 연기를 크게 뿜어내고 궐련을 재떨이에 꾹 눌렀다.
「 …… 내가, 도와주지 」
「 …… ? 」
「 내가 돈을 대준다, 고 말하는 거다 」
남자의 갑작스런 제의에 유리코도 후지타도 아연해 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신……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 이래 봬도 난 이름이 알려진 무역상이야 」
시바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 촌스러운 홋카이도 개척 사업으로 벼락 부자가 되어서, 전쟁에 편승해 조선업으로 싫다고 말할 만큼 벌었지. 돈만큼은 잔뜩 있어 」
「 …… 그렇게 부자인 당신이, 왜 이 집을 도와주시는 거죠? 」
「 무슨 말이야 」
「 당신도 아시는 대로, 우리에게 재산은 없습니다. 이용할 가치 따윈 눈꼽만큼도 없어요 」
「 이용한다고?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
「 세상 물정에 어두운 화족을 속여서 돈을 탐하는 무리는 산더미처럼 알고 있어요.
솔깃한 얘기를 꺼내 무지한 사람들을 구슬려서…… 」
「 과연…… 역시, 당신은 흔한 화족 영애와는 좀 다른 것 같군 」
시바는 재밌다는 듯이 유리코를 바라보았다.
「 그 야회에서도 일본도를 든 불량배를 상대로 거침없이 몰아붙이기에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더 당신이 갖고 싶어졌어 」
「 에…… 」
「 물론, 그냥 돈을 대준다는 건 아니야. 조건이 있다 」
시바의 얼굴이 굳는다.
실내의 공기도 팽팽해져 잠깐의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 당신이 내 신부가 되는 것이다. 유리코 씨 」
「 ──── 」
유리코는 숨을 삼켰다.
옆에서 후지타가 동요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 시…… 시바 님. 그런 이야기는, 우선 공주님이 아니라…… 」
「 아아, 그 방탕한 도련님인가. 아니, 지금은 영주님이었나.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잖아. 이건 나와 유리코 씨의 얘기니까 말이다 」
「 그, 그러나 」
「 싫──── 어요!! 」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 누가…… 누가, 당신 같은 사람하고!! 」
「 뭐야, 내가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
「 당신은 돈으로 사람을 회유하는 야비한 사람! 야만스러운 사람이예요!!
남의 집을 비열하게 조사하는, 그런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짓을 뻔뻔스럽게도…… 이 비겁자!! 」
시바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로 떠는 유리코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 …… 아아.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
「 읏!! 」
갑자기 팔을 잡아 당긴다.
유리코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저항하지 못하고 시바의 가슴으로 쓰러졌다.
그 가슴에서는 그날 밤과 같은 궐련의 냄새와 현기증이 날 듯한 오드콜로뉴의 향기가 났다.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나 유리코는 입술을 떨었다.
뜨거워진 뺨을 굳히며 큭하고 시바를 노려 보았다.
「 무, 무슨 짓이야! 」
「 난 당신처럼 기가 센 여자를 좋아한다구 」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거친 말을 속삭여져 허리에 오싹하는 한기가 스쳤다.
「 머지않아 그 마음을 녹여서 부드러운 몸을 지배하는 건 최고의 기분이다…… 고귀한 아가씨의 피부는 틀림없이 매끄러울테지 」
「 !? 추, 추잡해…… 이거 놔!! 」
유리코는 필사적으로 시바의 가슴을 밀쳐냈다.
그러나 그 탄탄한 가슴과 팔에 껴안겨 마치 줄로 얽매여 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 시바 님! 부디 무리한 짓은 그만둬 주십시오! 」
「 흥…… 뭐, 나중으로 미뤄둘까. 조만간 실컷 내 맘대로 할 수 있을테니까 」
시바에게 갑자기 풀려나, 벗어나려 애쓰던 유리코는 헛발을 내딛어 후지타에게 껴안겼다.
약간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며 폭풍처럼 가슴을 크게 헐떡인 뒤 목청껏 소리쳤다.
「 돌아가 주세요! 더 할 말은 없습니다!! 」
「 아아, 알았다. 지금은 돌아가지…… 그렇게 귀여운 얼굴 하지마 」
「 이, 이제 됐습니다!! 자, 빨리…… 돌아가요!! 」
유리코는 필사적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시바는 어깨를 움츠리며 유리코를 곁눈으로 흘낏 보고 파나마 모자를 깊이 눌러 썼다.
「 그럼 이만, 아가씨. 즐거움은, 지금부터다 」
시바는 천박한 말을 던지고 유유히 응접실을 가로질러 문 너머로 사라졌다.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유리코는 힘이 풀려 긴 의자에 풀썩 주저 앉았다.
「 공주님…… 」
「 괜찮아, 후지타…… 아무렇지도 않아…… 」
그 남자의 향기가 아직도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다.
강한 팔, 야만스러운 행동, 흘러넘칠 듯한 자신감, 오만한 눈동자 ──── .
그 남자는 여성에게 인기가 아주 많을 것이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어딘가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이렇게나 무례한, 부정한 짓을 당했는데도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응석을 부리는 장난꾸러기 꼬마 같은 분위기가 그 남자에게는 있다.
그렇지만 유리코에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성질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슬픔에 잠긴 이 집에 흙 묻은 발로 거침없이 들어와 난폭하게 돈과 이 몸을 교환하려 하고 있다.
그런 강행을 기뻐하는 여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코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그때, 응접실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시바가 돌아온 걸까, 유리코가 몸을 경직시킨 그때.
「 음…… ? 이런, 왜 그러는 거야, 이런 데서. 둘 다 지친 얼굴이잖아 」
불쑥 얼굴을 내민 건, 나른한 얼굴의 오빠였다.
단정하지 못하게 느슨한 기모노 틈새로, 피부에 착 달라붙은 붉은 흔적이 엿보인다.
유리코와 후지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마주 보았다.
「 담배 냄새가 나는데. 누가 왔었던 걸까 」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남의 일처럼 후지타에게 묻는다.
오빠는 마치 이 저택의 일 따윈 관계없다는 듯한 세계에 살고 있다.
여동생의 몸에 어떤 세파가 밀려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졸고 있을 뿐인 것이다.
유리코는 안타까워졌다.
오빠가 다정하게,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부평초처럼 미덥지 못하다.
삶에 관심이 없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오빠에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단지 공상화일 뿐이다.
액자 안의 유화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 …… 영주님…… 잠시, 이쪽으로 」
「 음, 뭐야? 정색을 해서. …… 그나저나 그 호칭은 정말 못 들어주겠네. 나한텐 전혀 어울리지 않아 」
미즈히토는 졸린 듯한 얼굴로 후지타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겨진 유리코는 막연한 초초함에 기모노의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 …… 난 혼자서 맞설 수 밖에 없어 )
의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없다.
언제나 자신을 자상하게 감싸주던 아버지는 죽어 버렸다.
이 몸을 강제로 차지하려는 그 남자에게서 방패가 되어 줄 존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 굴복할 마음 따윈 없어…… 하지만…… )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걸까.
돈도 힘도 있는 남자에게 이 몸 하나밖에 없는 여자의 몸으로 대체 무엇을.
유리코는 창 너머에 있는 평온한 정원을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은 이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 따윈 모른다는 모습으로 온화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 머지않아 어딘가에 시집 갈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각오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렇게 비참한 형태는 아닐 터였다.
유리코는 지쳐서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시작될 자신의 전락(転落)이, 눈 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 .
「 어머…… 그런 일이 있었구나 」
제국 극장에 간 다음, 친한 부인들과 긴자에서 잡담을 하고 돌아온 시게코는 다소 피곤한 얼굴로 후지타의 보고를 들었다.
후지타가 준비한 홍차를 천천히 마시고 밤의 정원에 시선을 둔다.
그 표정은 자기 딸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건성으로, 뭔가 다른 근심에 잠긴 것처럼도 보였다.
「 시바 씨가 그런 얘길 했단 말이지…… 확실히, 전부터 당신에게 흥미를 가진 것 같긴 했지만 」
「 제게…… ? 」
「 네에. 아무튼 당신은 적령기임에도 야회에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았잖아요.
다른 분에게도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들은 게 한 두번이 아니예요 」
야회에 나가지 않는 걸 자못 비상식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어머니를, 유리코는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유리코가 야회에 그다지 나가지 않았던 건 야회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같은 차림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건 상당히 가난한 집이라고 선전하는 것과 마찬가지.
어머니처럼 유복했던 아가씨 시절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치장을 즐기는 걸 관철할 정도로 화려한 세계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춤도 서투르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했지만…… 화사한 야회복은 동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의 재정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리코는 딸이었지만 그걸 잘 알고 있었다.
「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유리? 」
「 에? 저요……? 」
「 그래요. 당신의 결혼 얘기니까요 」
「 …… 저, 저는…… 」
「 난 반대야, 유리코 」
느닷없이 지금까지 침묵하던 오빠가 입을 열었다.
「 귀여운 여동생을 그렇게 천박한 남자에게 보낼까 보냐. 마치 짐승 같은 놈이다. 돈으로 결혼을 요구하다니…… 」
「 정말……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미즈히토 」
「 후지타는 완곡하게 설명했습니다만, 그런 겁니다, 어머님. 그 남자는 확실히 그렇게 말했겠지. 아닌가, 후지타 」
「 …… 네, 주인님 」
후지타는 시바가 이 집안의 재정을 모조리 알고 있다는 것이나, 유리코를 강제로 껴안은 것 등등은, 시게코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느긋한 모습으로 귀가했으나 상태가 이상한 유리코와 후지타에게 불안을 느낀 미즈히토는 후지타에게 전부 얘기하라고 말했다.
그 결과, 미즈히토는 여동생의 몸에 닥친 비상식적인 구혼에 몹시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게코는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상태였다.
「 어머나, 그랬구나…… 돈과 바꾸다니…… 품위가 없네 」
「 품위가 없다, 로는 넘길 수 없는 이야깁니다. 언어도단이야. 난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어 」
「 …… 나도…… 싫어요. 오라버니…… 」
생각하지 못했던 오빠의 강한 어조에 힘입어 유리코도 머뭇머뭇 본심을 입에 담았다.
「 그런 남자에게 시집가다니…… 너무 심해요. 그런, 지독한 사람…… 」
「 그렇겠지, 당연해. 그런 무뢰한과 함께하면 네가 불행해 질 게 뻔하다. 이런 혼담은 말도 안 돼 」
「 …… 좀 기다려 보세요, 당신들 」
마치 어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어머니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 이것도 하나의 인연입니다. 그렇게 덮어놓고 안 된다고 단정할 건 아니예요 」
「 그렇지만…… 」
「 확실히…… 그 사람은 좀 이례적으로 조야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훌륭한 분이예요.
아직 젊은데도 혼자 재산을 모았으니까요 」
「 어머님…… 어머님은 그 분에 대해서 잘 알고 계세요? 」
「 약간은요 」
시게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 내 친구의 지인이었어요. 야회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어서…… 화족은 아니지만 부인들에겐 대단한 인기였어요 」
「 엣…… 정말? 」
「 네, 그래요. 아주 드문 일이죠. 소위 졸부인 남자 분 같은 건, 우리 같은 여자는 보통 거북하게 여기니까 」
「 믿을 수 없어요. 그런 야만스러운 사람이 」
「 그…… 뭐라고나 할까, 그런 점이 얌전한 남자만 봐온 화족 부인에겐 자극적일지도 모르겠군요 」
「 무슨 뜻이예요…… ? 」
「 부자가 되서 사교계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졸부들은 다들 화족의 흉내를 내는 법.
그렇지만 어차피 타고난 품격은 자연스럽게 드러나 버리죠.
허나 그 분은 그러시지 않아요. 어딜 가더라도 자신의 방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관철하고 계세요.
물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많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시바 씨의 남성적인 매력에 넘어가는 부인도 많은 거예요 」
「 …… 저는 잘 모르겠어요 」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리코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시바라는 남자에게는 아마도 천성적인 매력이 있다.
불문곡직하고 여자를 사로잡아 버리는 듯한…… .
유리코 자신도 그 남자에게 끌어 안겼을 때, 설명할 수 없는, 어딘가 여자의 부분을 붙잡혀 버린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결벽한 아가씨의 자존심이 그걸 인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화족 부인분들이 그 분을 좋아하셔도 그 분은 화족을 싫어해요 」
「 어머…… 그래요? 」
「 이 집을 모욕했는 걸요. 자신에게 돈이 있다는 것만 강조하며 우릴 비웃었어요 」
유리코는 그때의 굴욕을 떠올려 무릎 위로 주먹을 쥐었다.
「 화족이라는 건 구제할 길이 없다, 고 했어요. 일도 안 하고 사치만 하고 있다고…… 」
「 …… 지금의 졸부는 대부분 그래요. 우아함을 모르시는 거죠 」
시게코는 설탕을 뿌린 작은 비스킷을 가볍게 집어 입에 넣었다.
그것은 참으로 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타고난 기품을 느끼게 하는, 우아한 거동이었다.
「 시바 씨는, 들었던 얘기로는 지독한 가난에서 엄청난 고생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해요.
우리들은 상상도 못 할 얘기지만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니 돈밖에 믿을 수 없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
「 …… 어머님! 」
그때,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미즈히토가 소리를 질렀다.
「 어머님은 그렇게 그 남자만 옹호하셔서…… 대체 어쩔 작정입니까! 」
「 …… 나는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예요 」
「 그럼, 어머님은 집을 위해 유리코에게 몸을 팔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 미즈히토…… 당신답지 않아. 진정하세요 」
「 이게 진정할 일입니까! 」
미즈히토는 고개를 흔들고 분하다는 듯이 거친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 말도 안 돼, 딸과 집을 저울질 하다니! 이런 집, 어찌되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
「 이런 집…… ? 이런 집이라고요…… !? 」
미즈히토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시게코는 아름다운 눈썹을 곤두세우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 다시 한 번 말해 보세요, 미즈히토!!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집이란 게 무슨 소립니까!!
적어도 당주라는 당신이 이 집을 업신여기다니…… 」
「 네, 말하죠! 몇 번이라도 말입니다! 」
그 오빠의 말에 유리코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머니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적이 없었던 오빠가 처음으로 어머니의 분노에 맞섰던 것이다.
「 집이라느니 관례 같은 데 얽매여서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가문의 이름 따윈 질색입니다!
내가 집을 위해 그림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던 건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유리코를 그런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것만은 반댑니다!
딸 한 사람의 인생이라구요! 그걸 돈에 팔라는 말입니까! 아아…… 생각만으로도 역겹군,
그런 걸로밖에 유지할 수 없는 집이라면 사라져 버리면 돼!!
집이 뭐라는 겁니까! 신분이 뭐라는 겁니까! 인간 그 자체가 행복하게 살 수 없다면 그런 건 내다 버리면 됩니다!! 」
「 …… 무 …… 무, 무슨 소리를…… 」
시게코는 창백한 얼굴로 경련이 일어난 뺨을 부들부들 떨며 미즈히토를 응시했다.
시게코 뿐만이 아니라, 유리코도 후지타도, 이 미즈히토의 성난 얼굴에 놀라고 있었다.
평소 익살스럽거나 얼버무리며 결코 진지한 마음 따윈 내보이지 않았던 오빠가 다른 사람처럼 거친 말투로 잇달아 말하는 것을,
유리코는 그저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쌓이고 쌓였던 게 폭발했다.
그런 인상이었다.
오빠는 어머니가, 당당한 남자가 나긋나긋하게 그림을 그리는 게 무슨 짓이냐며 무시하거나, 이과전(二科展)에 출품하기 위한 캔버스를 찢었을 때조차 슬픈 듯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는데…… .
「 아, 아…… 주인님…… 이 집은 이제 끝이에요…… 어쩌면 이렇게, 파렴치한…… 끔찍해…… ! 」
시게코는 눈을 팽팽하게 부릅뜨고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며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주인님이라 부르는 건, 죽은 남편이다.
미즈히토가 호주가 된 뒤에도 시게코만큼은 이 집의 당주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갑자기 시게코의 모습이 변했다.
욱, 하고 신음한다 싶더니 왼쪽 가슴을 누르고 움찔거리며 경직했다.
「 어, 어머님…… !? 」
「 마님!! 」
시게코는 등을 구부려 의자 위에 풀썩 엎드렸다.
저택은 그 야회 이후로 크게 시끄러워졌다.
곧바로 불려온 의사가 시게코를 가슴앓이라고 진단했다.
그 의사에게 들은 사실이지만, 시게코는 선대의 자작이 죽은 밤 이래로 약을 먹지 않으면 잘 수 없게 됐던 것 같다.
약의 양은 점점 늘어나서 몸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시게코는 심장이 약했다.
거기다 자작의 충격적인 죽음.
지금까지 이상으로 화려하게 놀러 다녔던 시게코의 행동은 쇠약해진 심신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단 실이 툭 끊어져 버리자, 그 밤은 목숨을 건졌으나 그 뒤로 걸을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생일 밤의 사건.
꿋꿋했던 어머니의 병.
그리고 대답을 찾지 못한 채 허공에 뜬 시바와의 혼담…… .
차례차례 닥쳐오는 불행에 유리코는 어쩌지도 못하고 망연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
구혼했던 그 날부터 3일도 채 지나기 전에 시바가 다시 왔다.
유리코를 부르러 간 동안 후지타는 시바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마침 여름 휴가로 문병 겸 노미야 가를 방문했던 히데오는 그걸 모른 채 거기로 들어가다 딱 마주쳐 서로 저도 모르게 앗 하는 소리를 질렀다.
「 당신은…… 」
「 여어! 이거 참. 그 야회 뒤로 처음 보는군, 군인 씨 」
시바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악수를 청하며 히데오를 향해 쾌활하게 웃음을 지었다.
히데오는 상대의 솔직한 분위기에 떠밀려 어색한 미소를 돌려주며 손을 잡는다.
히데오는 물론 시바의 장사에 대해서도 유리코에게 구혼한 것도 듣고 있었다.
파격적인 방식에 실제로 대면한다면 한 두마디 빈정거리려고 생각했으나 상대의 어울리지 않을 정도인 여유와 관록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나이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어째서인가.
히데오는 잠시나마 압도당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내 젊은 장교의 자존심을 되찾아 딱딱한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 일전에는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
「 천만에. 아아, 그러고 보니 자기 소개도 아직이었나. 나는 시바 준이치. 이렇게 보여도 무역상 나부랭이입니다 」
「 …… 본인은 육군 소위, 오자키 히데오라고 합니다 」
「 호오, 소위님인가 」
시바는 한 쪽 눈을 가늘게 떠 히데오를 바라보았다.
「 오자키 가…… 대전(大戦)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그 용감한 혈통이군요 」
「 …… 알고 계셨습니까 」
「 물론입니다. 나는 어떤 곤경에 처해 있어도 끝까지 모르는 척 축국 따위에 힘쓰는 공가(公家)님보다도,
당신의 집안처럼 공을 세워 신분을 얻은 분들을 좋아합니다 」
히데오는 깜짝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전의 야회에서 집안의 일로 유리코와 말다툼을 했던 직후다.
「 화족이 황실의 번병(藩屏)이라는 건 이름 뿐입니다.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입장이어야 할 자들이 땀내 나고 험한 군무는 싫다는 나약한 자들 뿐.
전쟁 뒤, 방대한 군인에게 작위를 하사했죠. 화족을 군인으로 만들지 않고 군인을 화족으로 만들어서 체면을 유지하고 있어요.
난 말이죠, 그런 그들을 마음 속으로 경멸하고 있습니다 」
「 그…… 그렇다면 어째서…… 이 집안 사람에게 구혼을 하는 겁니까 」
히데오는 시바의 꾸미지 않은 솔직한 말투에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의문을 제기했다.
시바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호오, 하며 고개를 갸웃한다.
「 알고 계셨던가. …… 그 프라이드 높은 아가씨는 수치라고 생각해 조개처럼 입을 다물 것 같았는데 」
「 본인은…… 그녀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
히데오는 약간 주저하며 그렇게 말했다.
「 그 녀석에게 들은 건 아니지만, 집안 사이의 교제가 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옵니다 」
「 …… 과연. 당신들은 소꿉친구라고 하는 거군요 」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의미심장하게 빙긋 웃는다.
「 그래서 그날 밤도 그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겁니까 」
「 읏! 보, 본인은 그저…… 」
「 …… 내게는 소꿉친구 같은 건 없으니까 어떤 감각인지는 모르지만…… 」
히데오의 동요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바는 혼자 짓궂은 미소를 띄운다.
「 뭐…… 구혼 이유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뭐랄까, 인연이 약간 있습니다 」
「 인연…… ? 」
히데오가 의아스럽게 여긴 그때, 응접실에 유리코가 들어왔다.
그 뒤로 후지타가 따르고 있다.
「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머, 히데오 씨. 어째서 여기에 」
「 별로. …… 너 같은 말괄량이한테 구혼한다는 신사는 어떨지 흥미가 있었을 뿐이야 」
「 …… 히데오 씨는 언제나 심술궂다니까 」
유리코는 얼굴을 붉히고 히데오를 째려보았다.
히데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유리코를 외면한다.
「 그럼, 전 슬슬 가보겠습니다 」
「 에…… 벌써? 히데오 씨, 방금 막 왔잖아 」
「 군인 주제라 해도, 약혼자와의 만남을 방해할 만큼 촌스럽지는 않다 」
「 야, 약혼자 같은 게 아니야!! 」
「 그렇습니다. 굳이 돌아가실 필요는 없어요 」
느닷없이 끼어드는 남자의 목소리에 유리코의 얼굴이 움찔하며 굳어진다.
「 듣자하니 아가씨와 깊은 관계지 않습니까. 그럼 나한테도 당신은 타인이 아닙니다 」
「 그러나…… 저는 이 집 사람도 아니고…… 이런 곳에 있는 건, 좀…… 」
「 히데오 씨, 괜찮아. 바로 끝날테니까 있어줘 」
유리코는 다그치는 듯이 강한 어조로 말하며 히데오의 눈을 꿰뚫어 버릴 것처럼 빤히 보았다.
히데오의 목덜미가 미약하게 붉은 기를 띈다.
그렇다면, 이라고 우물거리듯이 중얼거리며 무료하게 벽에 몸을 기댔다.
유리코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이내 시선을 내키지 않는 듯이 움직여 일전에 자신에게 만행을 저지른 남자에게로 옮긴다.
유리코의 눈에 제일 먼저 뛰어든 것은 그 손이 쥔 호화로운 붉은 장미 꽃다발이었다.
유리코는 수상쩍은 시선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 그럼, 인사가 늦었군요. 아가씨 기분은 어떠십니까 」
「 …… 덕분에 아주 우울해졌어요 」
「 아하하! 이거야 미움받았다는 거로군. 뭐, 상관없겠죠. 자, 받아주세요. 여성에겐 꽃이 필요합니다 」
「 감사합니다. …… 후지타 」
유리코는 시바에게 받은 묵직한 꽃다발을 향기도 맡지 않고, 산뜻하게 곁에서 대기하던 후지타에게 맡겼다.
시바는 불쾌하다는 기색도 없이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거리낌없이 유리코를 바라보았다.
「 그래서…… 결심은 섰습니까? 」
「 무슨 말씀이실까요 」
「 무정하군. 그렇게나 정열적으로 구혼했는데 」
「 …… 그런 짓을 정열적이라고 부르는 거라면, 전 영원히 얼어붙어 있고 싶어요 」
「 쿡쿡쿡……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언짢은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
유리코는 한숨을 쉬었다.
지쳐버린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 무례한 남자가 돌아가주길 원했다.
이 집의 약점을 재차 들추는 것도 부아가 치밀었지만, 사정을 말하지 않으면 이 남자는 언제까지나 눌러 앉을 듯한 기색이다.
유리코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 …… 어머님께서 편찮으세요. 저도 시중을 드느라 바빠서…… 당신을 상대할 겨를은 없습니다 」
「 호오…… 마님이 쓰러지셨나. 설마 스페인 독감이라도 걸리신 건 아니겠지 」
「 아, 아닙니다! 그저 지치신 거라고요! 우습지도 않은 얘기 하지마요! 」
지금 만연한, 걸리면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병명을 들먹여 유리코는 저도 모르게 눈꼬리를 치켜떴다.
「 아아, 미안 미안.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과연…… 그거 큰일이군. 당신도 상당히 지친 것 같아 」
「 네에. 당신도 아시다시피, 우리 집은 유복하지 않으니 일손이 부족합니다. 제가 어머님 곁에 있지 않으면…… 」
「 그래서, 당신도 환자와 함께 집안에 틀어박혀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건가 」
「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
「 당신이 계속 곁에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야. 그걸로 마님이 좋아지기라도 하나? 당신이 없으면 숨이 멈춰 버리기라도 하나? 」
「 장난치지 마세요! 제가 곁에 있는 편이 어머님도 안심할 수 있어요. 당신은 부모 자식 간의 정을 모르는 건가요?! 」
「 아아, 모르겠군. 난 아버지의 얼굴을 몰라. 어머니는 어릴 때 죽었다 」
「 아…… 」
「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설마 잠시도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은 아니겠지? 」
「 그, 그건…… 그렇, 습니다만 」
실제로 유리코가 어머니의 곁에 있어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의 시중은 어머니의 친가에서 온 하녀에게 일임해서, 유리코는 시바가 찾아올 때까지 침대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아무런 쓸모가 없더라도 자신이 병상에 있는 어머니의 곁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잃고 더욱이 어머니까지 잃게 될 거라 생각하자 유리코의 가슴은 짓눌리는 듯이 답답해졌다.
그렇지만 모르고 시바의 불행한 성장 과정을 찔러 버린 유리코는 죄악감으로 강하게 저항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 이 사람은…… 나보다 훨씬 어릴 때 이런 절망적인 기분을 느꼈었구나 )
대체 이 남자는 어떤 인생을 보내 온 걸까.
유리코는 이 정체 모를 남자의 윤곽을 조금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당황했다.
「 그럼 잠깐 정도는 여길 떠나도 되잖아. 이대로는 당신까지 병이 들고 말겠군.
어때, 밖에 나가지 않겠나? 제국 극장이나 서커스(チャリネ)나……
요정(料亭)에 밥을 먹으러 가도 되고, 포목점에서 옷을 골라도 좋아 」
「 엣…… 그, 그런…… 」
「 기분 전환을 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잖아. 뭐, 하루 종일이라는 건 아냐.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올테니까 」
「 …… 하지만, 전…… 그럴 기운은 없어요 」
「 그러니까, 그 기운을 차리러 가자는 거지. 딱히 당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도 업무에서 한숨 돌릴 겸 놀고 싶어.
거기에 어울려 주면 좋겠군 」
「 …… 강압적인 분이시네요 」
그러나 거기서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 느껴져 유리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이런 때에 놀자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시바와 함께 나가서 즐겁게 보낼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만약 마음이 밝아질 수 있다고 해도 이 저택으로 돌아오면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알고 있다.
적어도 어머니의 몸이 좋아지고 집도 어떻게든 회복된다면.
그렇게 되면 오빠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
후지타에게도 어깨의 짐을 내리게 해주고 싶다.
이 어두운 집에 다시 불빛을 켜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으로서는 눈앞에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 역시……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할 수 밖에 없는 걸까…… ? )
아련하게 떠오르는 마지마의 얼굴.
그는 어머니가 쓰러진 뒤로 매일 다른 종류의 싱싱한 꽃을 보내주고 있다.
그 다정함에 누구보다도 구원받은 건 유리코 자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공허함도 나날이 커졌다.
덧없는 마음을 아무리 쌓아 올려봤자 그건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강압적인 구혼을 받은 그 날부터 시바에 대한 것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형태야 어찌 됐든, 남자에게 원한다는 분명한 말을 들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쩐지 이상한 고동과 함께 회상하고 마는 시바의 향기를, 유리코는 필사적으로 청아한 마지마를 향한 마음과 바꾸려 했다.
「 공주님…… 」
「 에? 」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하던 유리코에게 침묵하고 있던 후지타가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자 약간 주저하는 기색을 비추면서도 여느 때처럼 가면 같은 얼굴로 입을 연다.
「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 후지타…… 」
「 저도 공주님께서 계속 어두운 얼굴로 계셔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공주님은 선대 주인님게서 돌아가신 뒤 밖에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셨으니 잠시만이라도 나갔다 오시는 게…… 」
「 나…… 그렇게나 우울하게 있었던 걸까 」
후지타의 말에 유리코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되도록 꿋꿋하게 행동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주위의 걱정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야말로 어릴 때부터 유리코를 보아 온 후지타에게는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렇게 권해주시는 분도 계시고 하니. 그냥…… 」
「 두 사람만 보낼 수는 없어 」
불안정한, 그럼에도 낭랑한 음색에 흠칫하며 뒤돌아 보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오빠가 소리도 없이 서 있다.
늘 그랬듯이 안개처럼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 눈은 뚜렷한 의지를 갖고 시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 유리코는 아직 시집가기 전인 아가씨다.
어디서 굴러온 말뼈다귀인지도 모를 남자와 둘이 나가는 상스러운 짓 따윈 시킬 수 없어. …… 그렇지? 후지타 」
「 …… 네, 주인님. 저도 누군가와 동행하시는 게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 흥…… 과연 애지중지하는 아가씨, 라는 거군 」
멸시하는 듯한 어조로 내뱉고 마치 자신이 이 집의 당주라도 되는 양 오만한 시선으로 미즈히토를 바라본다.
「 감시가 없으면 놀러 갈 수도 없다니, 정말 거북하네 」
「 자네가 부인에게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신사라면 나도 이런 말은 안 하고 넘어가겠지만 말야 」
「 하핫! 아무리 천민이라 해도, 처음부터 여자의 지조를 빼앗는 시늉은 안 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쪽이 저속하다는 거다 」
미즈히토는 시바의 난잡한 말에 그 여자처럼 온화한 눈썹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백과 흑, 물과 기름이라는 듯이 완전히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 …… 그러고 보니 정식 인사가 아직이었던가 」
미즈히토는 마음 속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듯, 애써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지금 이 집의 당주인 미즈히토다. 그날 밤 여동생을 구해준 건 고맙지만, 이런 형태로 재회할 줄이야 」
「 나는 시바 준이치다 」
냉정한 빈정거림을 되받아치듯이 오만한 음성이다.
「 다이도요코(大道洋行)라는 무역 상사를 하고 있지. 일전에 아가씨에게도 말했으니 이미 전해 들었겠지만,
내겐 이 집의 부채 전부를 정리할 용의가 있다 」
「 아아. 그런 거 같더군…… 물론 얘기는 들었어 」
「 후후. 그야말로 영주님답게 돈 따윈 흥미 없다는 기색이군 」
「 돈이라고 할까…… 난 이 혼담에도 흥미가 없어 」
「 …… 그 말은? 」
「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 여동생은 시집 보내지 않아 」
「 호오…… 」
시바의 눈이 위험한 빛을 띤다.
「 그건 내게 한하지 않고, 라는 뜻인가 」
「 아아. 그래 」
미즈히토는 피로해 보이는 얼굴로 여동생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 …… 나한테는 아직 여동생이 필요하거든 」
( …… 오라버니…… ? )
두 사람의 대화를 조마조마해 하며 관망하던 유리코는 오빠의 갑작스러운 애매한 발언을 헤아릴 수 없었다.
「 ………… 」
침묵을 지키던 히데오는 기분 나쁘다는 듯 미즈히토를 응시하고 있다.
기묘한 침묵으로 휩싸인 실내에 결국 후지타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 …… 주인님, 이제 슬슬…… 」
「 아아…… 그렇군. 우물쭈물하다간 해가 져 버리겠어 」
미즈히토는 아련히 꿈에서 깨어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럼, 시바 군. 여동생을 데리고 나갈 거라면 동행을 붙이고 싶은데, 괜찮겠지? 」
「 …… 아아. 별로, 난 상관 없어. 누구든 데려가도 돼 」
「 그거하고 여동생을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 버리면 곤란해. 오늘은 식사 정도로 해 주게 」
「 주문이 많네. …… 뭐, 상관없어. 나도 그렇게 시간이 있는 건 아니니까 」
재미없다는 듯한 시바의 말에 미즈히토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리코를 돌아보며 고개를 기울인다.
「 자…… 고르도록 해, 유리코 」
「 에? 고르라니…… 」
「 누군가를 데려가는 게 조건이라고 했잖아? 이 집에 있는 사람을 한 명 선택하렴 」
「 한 사람만 인가요? 」
「 아아. 너무 대규모로 나가도 무슨 일이냐고 눈길을 끌어 버릴테니까 말이야.
뭐, 네가 함께 있으면 제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면 돼 」
「 …… 그럼…… 」
선택지 * 개별 루트 시작
미즈히토
후지타
히데오
마지마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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